한반도에서 북한 금수산태양궁전 정도를 제외하고 가장 정치적인 공간이 청와대에서 경복궁을 거쳐 현 광화문광장까지 이어지는 축이다. 왕이 광화문 북쪽에서 ‘남면(南面)’해 정사를 보던 시절을 지나 근현대에도 광화문은 민중을 대하는 권력의 파사드(facade·건물의 정면) 성격이 강했다. 위정자들은 광화문과 그 앞 대로(광장)에 변화를 주며 ‘세상이 달라졌음’을 천명하고자 했다.
광화문 현판의 우여곡절도 맥을 같이한다. 알려져 있듯, 현판 글씨는 훈련대장 임태영의 한자 ‘光化門’(1867년)→박정희 대통령의 한글 ‘광화문’(1968년)→한자(2010년)로 바뀌었다. 2005년엔 ‘개혁군주 정조 글씨 집자(集字)’ 주장으로 논란이 일었고, 2010년 내건 새 현판은 여러 차례 갈라졌고 바탕색과 글씨 색도 잘못됐다. 모두 당시 대통령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광복절 기념식에 맞춰 새 현판을 제막하려던 것과 무관치 않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지난달 20일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국무회의에서 한글 현판 추가 설치 방안을 검토하자고 제안했는데, 거기에도 그런 측면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올해가 한글날의 효시인 가갸날 선포 100주년으로…이번에 한글 현판을 추가로 설치하면 합리적인 대안이 될 것”이라는 장관의 보고에서 ‘이번에’가 귀에 ‘턱’ 하고 걸린 건 사실이다. 문맥상 ‘올해’로 들리는 탓이다. 국가유산청에 미리 켜 놓은 현판용 자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무를 제대로 말리는 데만 수 년이 걸린다는 걸 우린 앞선 실패에서 배웠다. 문체부 측이 “구체적 일정이 정해진 건 아니다”라고 설명한 만큼 서두르다 새로운 논란을 만드는 일은 부디 없길 바란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이 한글 현판 추가 설치 제안에 공감한다고 밝히긴 했지만, 문화유산 관련 학계에선 반대 의견이 더 많은 것 같다. 전통 사상과 현대의 연속성을 탐구하는 한 학자는 기자에게 “한글로 뭔가를 새로 쓴다면 옛 문(門)의 이름보단, 미래 가치를 담은 문구를 광장에 장식하는 게 나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기존의 현판 관련 논의는 문화유산의 원형 복원에 대한 입장뿐 아니라 정치적 좌우, 전통과 박정희 시대를 바라보는 가치관 등에 따라 온갖 의견이 뒤얽힌 면이 있다. 지금의 한자 현판은 ‘원형대로 바꾸는 게 그나마 반대가 적어서’ 결정된 측면이 없지 않다는 말도 들린다.
하지만 기존 현판을 내리는 것도 아니고 하나를 더 거는 정도라면 ‘문화유산의 원형 보존이냐 훼손이냐’ 하는 이분법적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다음 달 방탄소년단(BTS)의 컴백 공연 ‘아리랑’이 열리는 등 점점 더 우리 문화를 상징하는 주요 공간으로 변모할 광화문이니, 문화유산의 ‘활용’ 측면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강정원 국립한글박물관장은 “비티에스(BTS)가 광화문 담장을 미디어 파사드로 연출한다는데, 한글도 활용해서 세계에 그 아름다움을 알리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다.
경복궁은 한글이 창제된 곳이고, 광화문과 한글은 일제강점기 함께 수난을 겪었다. 한글 사랑이 곧 배타적 국수주의와 등치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시간을 들여 차분히 현판 추가 설치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게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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