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수

김현수 부장

동아일보 경제부

구독 113

추천

뉴욕의 모든 것을 글에 담습니다.

kimhs@donga.com

취재분야

2025-06-13~2025-07-13
칼럼47%
국제경제17%
국제일반13%
미국/북미10%
인사일반7%
국제정치6%
  • [오늘과 내일/김현수]AI 고속도로, 멈칫할 시간이 없다

    미국 시애틀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쯤 거리에 있는 소형모듈원자로(SMR) 연구소에 가본 적이 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2008년 세운 테라파워의 ‘에버렛 연구소’다. 촬영이 엄격하게 금지된 이곳에는 핵 원료를 뺀 연구용 ‘미니 원전’이 건물 안에 그대로 올라와 있었다. 미니 원전을 대형 선박에도 실을 수 있고 모듈화해 공장에서 뚝딱 만들어 ‘배송’할 수 있다는 점도 신기했다. 무엇보다 아직 개발 단계인데도 와이오밍주에 부지를 선정해 실증단지 사업을 시작했다는 점이 놀라웠다. 실험적인 원자로 건설에 있어 부지 선정이 가장 큰 뇌관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게 우리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6월에 공사를 시작했고, 올해 5월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 덕에 신규 원자로 허가 심사 기간이 대폭 줄어 순조롭게 2030년 원자로 가동이 가능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변전소 증설도 어려운 韓 우리 정부도 첫 SMR의 2035년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SMR의 최대 장점은 전력이 필요한 반도체 공장이나 데이터센터 단지와 같은 수요지에 세울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기술 개발에 성공해 상업 가동 능력을 갖추더라도 주민들의 반대, 이를 의식한 지방자치단체의 우려를 극복하고 설득해 나가는 과정이 속도전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실험적 원자로보다 훨씬 단순한 변전소 건설조차 쉽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경기 하남시 동서울변전소 증설 사업이 대표적이다. 한국전력이 사업을 추진한 지 5년이 됐지만 삽도 뜨지 못하고 있다. 동해안의 값싼 전기를 수도권 반도체 산업단지 등에 공급하기 위한 관문이지만 인허가 갈등에 지지부진한 상태다. 변전소 증설 하나에 소송전, 1인 릴레이 시위, 전 국민 호소문까지 등장해야 하는 현실 속에 AI 전력망 확충은 요원한 얘기처럼 들린다. 원전, SMR, 태양광 등 발전원이 전력을 만드는 공장이라면 송전망은 전력을 실어 나르는 고속도로, 변전소는 분기점이나 톨게이트 역할을 한다. 공장 생산능력이 부족해도, 고속도로가 너무 좁아도, 분기점이 제 역할을 못 해도 전력난이 발생한다. 동해안에 민간 발전사들이 수조 원을 들여 발전소를 지어도 하남시 변전소 문제로 10%밖에 가동하지 못하고 있다. 발전소도 변전소도 모두 땅이 필요하니 곳곳에서 벌어질 이해관계자들의 갈등은 불 보듯 뻔하다. AI 전력 기근, 美도 “정전 100배 늘 것” 문제는 전력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는 점이다. 구글 검색 한 건보다 챗GPT 답변 하나가 전력을 10배 잡아먹는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글로벌 데이터센터용 전력 수요만 향후 5년 동안 두 배 이상 늘어날 전망이다. 너무 덥고 추운 이상기후도 전력 부담을 가중시켜 대규모 정전 공포는 커지고 있다. 미 에너지부는 8일(현지 시간) “추가 발전 용량을 확보하지 못하면 2030년 정전 발생이 지금보다 100배 증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빅테크들이 천문학적 전력 투자에 나선 미국조차 여전히 발전원과 전력망이 턱없이 부족해 데이터센터 건설에 차질이 빚어지는 곳도 나오고 있다. AI 전력 기근 속에 우리도 인허가 절차 등을 간소화하는 ‘전력망 특별법’이 9월에 시행된다. 하지만 내년 지방선거 전까지 지역 곳곳의 이해관계를 풀기란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AI 고속도로 건설’을 내건 새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정부의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 산업 인프라 확충은 그 어느 나라보다 한국이 가장 잘해 온 분야였다. 산업화 시기에는 고속도로를, 정보화 시대에는 초고속 인터넷망을 깔아 새로운 산업의 탄생을 뒷받침해 왔다. 새 정부도 하루빨리 구체적인 에너지 발전원 확보 전략과 더불어 전력망 확대의 청사진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김현수 경제부장 kimhs@donga.com}

    • 2025-07-1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김현수]벼락거지는 이제 그만

    “지금 미국의 20대는 역사상 가장 많이 화가 난 20대일걸요.” 지난해 5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선후보 지지 집회를 취재차 찾은 적이 있다. 민주당 지지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뉴욕에서 트럼프 후보를 지지하는 20대 젊은 청년이 보이기에 신기한 마음에 말을 걸었다. 지지 이유를 묻자, 갑자기 그는 현실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자신은 그나마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있지만 친구들은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월세와 생활비가 너무 올라서 살기가 힘들다고 했다. ‘미국 경제 성장률이 높은 편인데 무슨 소리냐’고 되묻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주식이나 집을 보유한 일부만 부자가 되고 있다. 우리 세대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자산 인플레이션의 상흔 그와의 대화는 정치 지형을 떠나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자산 인플레이션이 남기는 상흔이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뉴욕은 기본적으로 집값과 월세가 수십 년 동안 가파르게 올라온 도시지만 팬데믹 전후 상승률은 연일 기록 경신 수준이었다. 이런 자산 인플레이션은 단순히 경제적 부담을 떠나 세상을 대하는 태도, 직업을 고르는 기준, 결혼에 대한 관점 등 사람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트라우마 수준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뉴욕만큼 부동산 폭등기를 지켜본 서울도 그 후유증이 대단하다. 성실하게 공부해서 비교적 탄탄한 직장을 가져도 안정적인 거주 환경을 가질 수 없다는 허탈감과 무력감이 대다수를 짓누르고 있다. 오죽하면 하루아침에 부동산 유무에 따라 확대된 빈부격차에 ‘벼락거지’라는 신조어가 생겼을까. 특히 서울 부동산 문제는 정부의 규제가 오히려 집값을 부채질하고 공포 심리를 자극해 왔다는 점에서 여타 다른 나라들의 자산 인플레이션 양상과 다른 지점이 있다. 금융 당국이 가계 부채를 관리할 필요성은 있지만 그렇다고 실수요자가 자신의 담보로, 시장 금리에 따라 대출을 받으려는 것까지 규제한다면 반드시 부작용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규제 시그널이 패닉 바잉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규제보다 공급에 방점 찍혀야 2019년 12월 서울 전역을 투기과열지구로 묶어 15억 원 이상 주택에 대한 주택담보대출을 금지했던 규제가 대표적이다. 15억 원에 대한 명확한 근거도 없었고, 애꿎은 실수요자들마저 자기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 없게 된 정책이었다. 결국 현금 부자들만 서울 고가 주택에 접근할 수 있었다. ‘대출을 받을 수 있을 때 받아야 한다’는 잘못된 경험치만 쌓였다. 새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서울 부동산이 들썩이는 것도 추가 규제에 대한 우려가 반영됐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주담대가 나오지 않을 가능성, 토지거래허가제 등 규제가 확대될 가능성에 연일 서울 곳곳의 부동산에 매수가 빗발치고 시장이 과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 부동산 ‘불장’ 우려에 새 정부는 은행 규제를 통해 주담대 총량을 조절하려는 규제를 검토한 상태다. 금융 당국은 은행들을 불러 주담대 대출 금리를 낮추지 못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이에 신용이 탄탄한 주담대 금리가 자영업자 대상 대출 금리보다도 높은 역전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실수요자들이 불필요한 이자 비용을 더 내는 피해로 이어지는 셈이다. 안정적인 거주 환경에서 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이를 어렵게 만드는 부동산값 폭등의 상흔은 오래가고 여파가 크기에 새 정부가 중점적으로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수요를 억누르는 데 방점이 찍히면 규제 신설이나 폐지 시그널 때마다 시장의 변동성을 높인다. 결국은 시장 수요자들이 원하는 공급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정부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지속 가능한 공급에 방점을 둔 정책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김현수 경제부장 kimhs@donga.com}

    • 2025-06-1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김현수]한국판 ‘트럼프 트레이드’ 올까

    최근 만난 금융권 고위 임원의 표정이 밝았다. 주가가 6개월 전 수준 이상으로 회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6개월 전인 지난해 12월 3일 고점을 찍었던 주가는 그날 밤 계엄 사태 이후로 곤두박질쳤었다고 한다. 4월에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폭탄이 주가를 뒤흔들었다. 이제서야 계엄 이전으로 돌아간 것이다. 차갑게 식어가는 한국 경제에서 금융권은 실적이 좋은 거의 유일한 업종이라는 점이 주가 상승에 영향을 줬겠지만 한국 증시에 외국인투자가가 돌아오고 있다는 분석도 내놨다. 원-달러 환율이 계엄 이전 수준으로 내려가고, 대통령 선거에서 주요 후보들이 모두 증시 부양책을 내놓겠다고 호언장담한 점이 영향을 주고 있다는 의미다.희망 반, 기대 반에 소비심리 반등 실제로 골드만삭스는 최근 ‘한국-지금이 상승세의 시간(Korea―Time for upside is now)’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내고 대선을 계기로 한국의 정치적 불확실성이 사라지고 ‘밸류업’ 프로그램이 활성화돼 증시 반등이 시작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트럼프 대통령이 상호 관세를 발표했던 4월 한 달 동안 외국인투자가들은 무려 13조6000억 원을 순매도했지만 5월 들어선 현재까지 1조4000억 원 이상을 순매수하고 있다. 투자, 고용, 수출 등이 모두 절망적인 경제지표 틈새에서 실낱같은 긍정적인 소식도 들렸다. 5월 소비자심리지수(CCSI)가 101.8로 4월(93.8)보다 8.0포인트(p) 오른 것이다. 소비자심리지수는 말 그대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뜻한다. 100보다 높으면 경제를 낙관적으로, 100을 밑돌면 비관적이라는 본다는 것이다. 7개월 만에 처음으로 100을 넘어선 데다 상승 폭으로 따지면 2020년 코로나 공포가 다소 누그러졌던 그해 10월(+12.3p) 이후 4년 7개월 만에 전월 대비 최대 상승 폭이다. 계엄 사태에 억눌렸던 소비자들의 마음에 대선판 장밋빛 약속에 대한 기대감이 스며들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경제는 경제주체들의 판단과 선택의 결과인 만큼, 소비자들의 마음에 희망 한 방울이라도 생긴 것은 0%대의 암울한 성장률 전망 속에서 고무적인 소식이다. 미국에서도 지난해 대선 이후 트럼프 행정부의 친시장 정책 기대감에 소비심리가 개선되고 증시에 돈이 몰리는 ‘트럼프 트레이드’가 등장한 바 있다.‘혹시나’가 ‘역시나’가 되지 않길 하지만 신고가를 써 내려간 트럼프 트레이드는 취임 후 뒤이은 관세폭탄과 일관성 없는 정책 탓에 단기성 테마 이벤트로 전락했다. 증시도 채권 시장도 모두 출렁이며 실물경제까지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키웠다. 확실한 정책이 뒷받침되지 않는 막연한 기대가 얼마나 힘이 없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게다가 양극화된 정치 상황에서 소비심리가 당파적으로 나뉜다는 조사도 있다.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미시간대 소비자심리지수 조사에 따르면 공화당 지지자들의 소비자심리지수는 급격히 상승한 반면, 민주당 지지자들의 심리는 떨어졌다. 반대하던 후보의 당선은 소비심리를 악화시킨다는 의미다. 갈등이 극에 달한 한국 정치 지형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0%대 성장률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그나마 싹이 튼 낙관적인 기대가 실물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려면 실질적인 경제 정책뿐 아니라 갈등을 봉합하는 통합의 리더십도 필요하다는 의미다. 게다가 단기적으로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통해 경기 부양을 하되 장기적으로 제조업 쇠퇴, 혁신 동력 악화, 생산성 저하와 같은 구조적인 문제까지 대수술에 나서야 하는 매우 어려운 시점이다. 리더십 공백 속에서 겨우겨우 버텨 온 한국 경제에서 ‘정치적 불확실성’ 같은 단어들도 완벽히 지워져야 한다. 짧은 선거 기간에 정책 검증 없이 치러지는 선거지만 국민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또다시 희망을 찾아 나서고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국민들의 희망에 ‘역시나’로 되갚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김현수 경제부장 kimhs@donga.com}

    • 2025-05-2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김현수]‘말하면 찍힐까’ 숨죽인 韓 경제인들

    지난해 이맘때 워런 버핏이 이끄는 버크셔해서웨이 주주총회를 취재차 찾았다. 94세의 버핏이 5시간 동안 쏟아지는 질문에 차분히 답하는 모습도 인상 깊었지만, 더 눈길이 간 건 새벽부터 줄을 서며 입장을 기다리던 3만여 명의 주주들이었다. 관광명소 하나 없는 미국 중서부의 작은 도시,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 왜 이토록 많은 이들이 모였을까. 그들에게 물으니 “지혜를 얻고 싶어서”, “아이들에게 검소한 삶의 태도를 보여주고 싶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투자 비법보다도 ‘성실하게 돈을 벌고 생활은 검소한’ 버핏의 미국적 가치에 목마른 모습이었다. 버핏만의 신념에 기반한 이야기를 들으러 해마다 주총이 열리는 5월 첫째 주 토요일, 오마하에 수만 명이 몰리는 것이다.트럼프에게도 직언하는 美 CEO들 정치적 발언을 자제하는 편인 버핏은 필요할 땐 목소리를 내 왔다. 올해에도 많은 이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혼란스러운 관세 정책에 대해 버핏이 목소리를 내주길 기대했다. 그는 “무역은 무기가 아니다”, 동맹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엄청난 실수”라며 직언했고, 이는 전 세계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소셜미디어로 여론을 몰아가는 시대에 버핏 같은 인물의 한마디가 여론의 균형추 역할을 한 셈이다. 정권 초 서슬 퍼런 트럼프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날린 이들은 또 있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회장은 “이대로 가다간 미국에 대한 신뢰가 추락할 것”이라고 했고, 공화당의 큰손 후원자인 켄 그리핀 시타델 최고경영자(CEO)는 “트럼프가 미 국채 가치를 훼손했다”고 비판했다. 제조업 CEO들은 주주들에게 상세한 ‘관세 청구서’를 공개했다. 팀 쿡 애플 CEO가 대표적이다. 그는 1분기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 “트럼프 관세로 이번 분기에만 9억 달러(약 1조2600억 원) 비용이 들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때로는 단순한 팩트가 정치적 논란을 낳기도 하지만 주주들에게 상세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원칙은 지켜지는 것이다. 흔들리는 미국 민주주의 속에서도 그나마 경제계 리더들의 직언은 여론을 지탱하는 공공의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각계의 직언에 목마른 한국 하지만 한국 경제계는 더욱더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경제단체장을 제외하고는 이름을 걸고 직언하는 기업이나 금융권 인사들을 보기 어렵다. “말하면 찍힌다”는 인식이 지난 10년 사이 공고해진 탓이다. 그나마 사석에서 ‘관계자’ 코멘트를 전제로만 솔직한 의견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실명이 아닌 익명의 발언은 힘이 덜하다. 매번 같은 경제단체의 같은 주장도 신뢰를 유지하기 어렵다. 재계에서 실명으로 정부 정책을 정면 비판한 마지막 사례는 아마도 2011년 이명박 정부가 초과이익공유제를 추진했을 때였을 것이다. 당시 이건희 삼성 회장이 “사회주의 용어인지, 들어본 적도 없고 이해도 안 된다”고 발언해 파장이 일었다. 사회 각계의 솔직한 의견이 부딪치며 일어나는 이런 파장은 민주주의에서 꼭 필요한 존재다. 하지만 요즘의 ‘파장’은 주로 정치권이나 유튜버들의 요란한 주장에서 나온다. 경제계뿐 아니라 각계의 상식적인 목소리는 그 소음에 묻히고 있다. 정치가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때, 이를 견제하고 바로잡을 목소리가 점점 사라지는 것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나섰다가 찍혔다’는 경험, 흠결을 용납하지 않는 대중, 그 모든 리스크를 지기 두려운 경제인들. 상식적인 직언이 없는 사회에서 우리는 한국판 버핏들의 지혜를 들을 수 없게 됐다. ‘관계자’ 코멘트에 숨을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우리는 이미 극단적 갈등을 그 대가로 치르고 있다.김현수 경제부장 kimhs@donga.com}

    • 2025-05-0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김현수]환율전 베테랑 나섰다… 판 달라진 관세협상

    다음 주 한미 재무장관이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만난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미국에 ‘면담’을 요청했더니 미국이 콕 집어 ‘통상 의제’를 제안했다고 한다. 재무장관 회담 핵심 의제가 관세가 된 것은 이례적이다.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기관총처럼 쏘아대던 관세전쟁이 산업 정책에서 환율 및 금융 정책으로 확장됐다는 점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관세전 핵심 참모 역할도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에게 넘어갔다. 그의 행보를 보면 향후 관세 협상 전개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파운드화 무너뜨린 젊은 베선트 베선트 장관이 최근 한국과 일본에 “빨리 협상하라”는 메시지를 던진 외신 인터뷰 장소도 상징적이었다. 장소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타이밍은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이 15년 만에 환율 통제 정책을 폐기하고, 국제통화기금(IMF)이 아르헨티나에 대규모 구제금융으로 화답한 직후였다. 고정환율을 방어하느라 나라 곳간이 텅텅 빈 아르헨티나가 중국 돈에 매달리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다. 베선트 장관은 IMF 구제금융 뒤에 미국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중국 지원을 받느니 미국 달러 시스템에 합류하는 게 낫다는 것을 보여주러 현지에 간 것으로 보인다. 국제 정세와 돈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은 헤지펀드 출신 베선트 장관의 오랜 장기였다. 1992년 영국 파운드화가 무너진 유명한 ‘블랙 웬즈데이’ 뒤에도 그가 있었다. 영국이 유럽과 환율을 연동하자 전설적 투자자 조지 소로스와 젊은 베선트는 파운드화 급락에 베팅했다. 영국 금융시스템의 약점을 꿰뚫어본 예측은 정확했고, 영국은 금융위기 직전까지 갔다. 베선트는 2010년대에도 일본 엔화 하락에 베팅해 큰돈을 벌기도 했다. 상대국 금융 시스템의 약점을 파고드는 베선트가 전면에 나서자 시장은 ‘제2의 플라자 합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1985년 미국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달러 약세와 엔화 강세를 유도한 환율 협정이다. 40여 년 후 트럼프 대통령의 경제 책사 스티븐 미런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이 내놓은 이른바 ‘마러라고 합의’ 보고서도 달러 약세로 무역적자를 줄이자는 것이 골자다. 고율 관세를 앞세워 각국을 협상장으로 부르고, 협상에서 달러 약세를 유도하는 대신 군사 동맹국에 초장기 국채를 강매해 기축통화 지위는 유지하겠다는 제2의 플라자 합의와 같은 내용이다.제2의 플라자 합의 나오나 보고서대로 실제 ‘막가파식 관세쇼’ 이후 각국이 미국 협상 테이블로 달려가고 있다는 점이 섬뜩하다. 협상장에는 환율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베선트가 있다. 그는 미국과 공동 환율 목표를 가지고 있는 국가에 안보 우산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그도 안다. 일본과 중국은 다르다는 것을. 최근 인터뷰에서 “플라자 합의는 (일본이) 미국의 경제 경쟁국이면서 군사적 동맹 관계라 가능했다. 중국은 군사적으로도 경쟁국이라 새로운 포뮬러가 필요하다”고 했다. 중국은 오랫동안 플라자 합의와 일본 버블 경제 붕괴를 철저하게 공부해 왔다고 한다. 위안화 절상 합의는 결단코 피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중국이 버티는 가운데 한국에 안보 우산을 지렛대로 한 원화 절상 압박이 커진다면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격 경쟁력은 상대적인 것이다. 중국 위안화 가치는 내려가는데, 원화 가치만 크게 오르면 수출 시장에서 ‘초초저가’ 중국산과 경쟁해야 한다. 다른 수출 경쟁국의 협상 결과에 따라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관세, 환율, 안보가 총망라된 복잡한 전쟁 속 협상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다. 레이 달리오 같은 월가 거물들이 “세계 경제-정치 질서의 중대한 변화”라고 한 경고를 곱씹으며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야 하는 이유다. 김현수 경제부장 kimhs@donga.com}

    • 2025-04-1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김현수]‘4월 2일’ 오는데 추경도 못 한 잃어버린 1분기

    “설마 그날과 그날이 겹치진 않겠죠?”최근 한 금융계 고위 인사가 걱정스레 말했다. 그가 말한 첫 번째 ‘그날’은 4월 2일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해방의 날(Liberation Day)’이라고 이름 붙인 상호 관세 부과 시작일이다. 불공정한 무역으로부터 미국 경제를 ‘해방’시킨다고 해서 해방의 날이다. 발표 전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관세라 시장의 불안감은 크다.두 번째 ‘그날’은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심판 선고기일이다. 어떻게 결론 날지에 따라 정국과 시장에 미칠 영향이 작지 않다. 이 인사는 ‘내우외환’ 사건이 동시에 벌어져 지난해 12월처럼 원-달러 환율이 폭주하는 상황을 걱정한 것이다.12월 트라우마 시달리는 경제계물론 헌법재판소가 선고 기일로 ‘4월 2일’은 피할 것이란 전망이 많다. 관세 폭탄이 시장에 미칠 즉각적 영향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그날이 서울 구로구청장 등 재보궐선거일이어서다. 관세 폭탄과 헌재 일정이 어떻게 비켜갈지 알 수 없으나, 경제인들이 최악의 시나리오 목록을 작성하고 있다는 것은 이들의 불확실성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지 보여준다.경제계는 여전히 12월 트라우마에 몸서리친다. 2024년 마지막 외환시장 거래일인 12월 30일 환율은 주간 거래 기준 1472.5원에 장을 마쳤다. 연말 환율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27년 만에 최고 수준이다. 12월 3일 1402.9원이던 환율은 윤 대통령의 계엄 선언 직후 급등을 시작해 수사 및 체포로 갈등이 고조된 30일에 기어이 1470원대로 마감했다.뜻밖의 연말 환율에 은행도, 기업도 난리가 났다. 분기 말 환율은 주요 지표의 기준 환율이 된다. 은행 건전성을 나타내는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대표적이다. 환율이 오르면 달러로 빌려준 돈 가치가 올라 BIS 비율이 떨어진다. 숫자의 변화는 실물경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은행은 비율을 맞추려 신용이 낮은 기업부터 대출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은행 돈까지 끊긴 한계기업은 살아남기 어렵다.‘12월 트라우마’는 또다시 1분기(1∼3월) 말일과 관세 폭탄을 앞둔 요즘 재연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덕수 총리 탄핵심판 선고일인 24일에도 뛴 원-달러 환율은 25일엔 50일 만에 1470원을 터치했다. 윤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일이 지정되지 않자 불확실성이 장기화될 것으로 보고 환율이 널뛴 것이다.4월 관세전쟁 대비도 손 놨나불확실성의 장기화 속에 우리 경제계의 1분기는 처참하게 지나가고 있다. 1분기는 글로벌 투자사들이 각국에 투자 예산을 결정하는 시기다. 적극적 투자 유치는커녕 ‘국가 신용등급을 지킨 게 어디냐’며 만족하는 데 그쳐야 했다. 3월 소비심리는 다시 떨어졌고, 4월 기업경기 전망도 하향세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24일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대화의 물꼬를 텄지만 후속 협상과 ‘팀 코리아’를 이끌 리더십은 공백 상태다.정 회장은 미 현지 공장 준공식에서 “4월 2일 이후가 중요하다”며 민관 원팀의 관세 대응 필요성도 강조했다. 정 회장에게 ‘4월 2일’은 당연히 관세전쟁 ‘디데이’이기에 굳이 설명 없이 날짜로만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다는 의미다.경제계가 긴장하는 4월 전쟁에 국회는 관심이나 있을까. 여야는 일찍이 추가경정예산(추경)이라도 편성해 경기 대응 체제에 나서야 했다. 수출 내수 동반 부진 속 4월 관세전쟁을 우려해 왔다면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잃어버린 1분기’ 끝에 우리는 여전히 12월 속에 갇혀 있다. 어떻게든 경제를 국정 운영의 중심에 되돌려 놓고 4월을 맞아야 한다. 김현수 경제부장 kimhs@donga.com}

    • 2025-03-2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김현수]트럼프 관세에 美 테슬라 울고, 中 BYD는 웃는 이유

    요즘 서학개미들은 속이 끓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올린다” 한마디면 오르던 주가도 와르르 무너진다. 특히 한국인이 가장 많이 보유한 주식 1위 테슬라, 2위 엔비디아가 유독 폭락의 주인공이 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미국과 유럽 곳곳에서 부쩍 확산되는 테슬라 불매운동도 주가를 끌어내리고 있다. 美와 우방국 분업 체계 흔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이 특히 테슬라, 엔비디아 등 M7(매그니피센트 7)’ 주가를 뒤흔드는 것은 관세가 미국 경제를 결코 ‘위대하게’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치명적 피해로 돌아올 것이라는 시장의 전망을 반영한다. 미 빅테크 7개 기업을 일컫는 M7은 미국 ‘나 홀로 성장’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올 들어 테슬라는 28.3%, 엔비디아는 16.1% 주가가 떨어졌고, 미 소비심리도 약화되는 분위기다. 미국 빅테크가 흔들리면 한국과 대만, 일본 증시도 덜컹거린다. 서로 긴밀한 분업 체계 속에 있어 서로에 대한 관세나 시장 침체가 직접적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생태계 ‘팀 엔비디아’에 탑승한 SK하이닉스나 TSMC 주가가 지난주 관세 전쟁이 본격화되자 급락한 것이 대표적이다. 2000년대 이후 특히 테크 산업은 미국이 기술 혁신을 이끌면 한국과 대만이 반도체를 만들고, 중국에서 완성품을 조립한 뒤 세계 시장에 파는 분업 체계로 눈부신 성장을 해왔다. 하지만 2018년 트럼프 1기 미중 무역전쟁이 시작되자 중국을 배제하는 ‘친구끼리’의 분업 체계로 방향이 바뀌었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각국을 압박하며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 일본, 대만, 한국 등 ‘칩 4’ 동맹을 강화했다. 대만 TSMC도, 한국 삼성전자도 모두 중국 시장 타격을 일부 감내해야 했지만 안보 협력 속 분업 체계에 힘을 보탠 것이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사 ASML도 마찬가지로 중국 수출을 희생하고 미국과 한배를 탔다. 단순히 무역 적자로 따지기 어려운 안보-경제 공동운명체를 다진 셈이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모든 ‘분업 체계’를 미국 땅에 들여와야 한다며 한배를 탔던 친구에게도 관세전쟁을 걸어 오고 있다. 북미 자동차 공동 생산망을 구축했던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가 관세전쟁을 시작한 것이 매우 상징적인 장면인 이유다. ‘관세 협박’만으로도 공급망에 불확실성의 상흔을 남긴다. 게다가 미중 관세전쟁이 커지면 기업들은 중국 시장을 추가로 잃을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테슬라 매출에서 중국 시장 비중은 약 20%, 엔비디아는 13% 수준에 달한다. 美가 때릴수록 中 반도체 자립 딜레마 중국은 어떨까.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지난달 10%, 3월에 추가 10% 관세를 맞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테크 시장을 중심으로 중국 기업 몸값은 올라가는 중이다. 그간 자국 중심의 테크 분업 체계 구축에 절박하게 매달려 왔기에 비교적 관세전에서 선방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반영됐다. 전기차 BYD만 봐도 내수 시장에 주로 의존하고 미국 수출 물량이 미미하다. 자율주행 기술 기대까지 얹어 올 들어 30% 가까이 주가가 올랐다. AI 딥시크가 중국 테크 기업들의 인프라 투자를 촉발한 덕도 봤다. 미국이 규제로 때릴수록 중국의 반도체 개발에 불이 붙는 딜레마도 이어지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화웨이 칩이 중국의 엔비디아로 부상하고 있다며 “미국 규제가 역설적으로 중국 기업들의 혁신 동력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고 평했다. 미중 패권전이라는 흐름 속에 우방국 중심의 분업 체계에 올인해 왔던 한국으로서는 트럼프 2기발 새로운 세계질서의 변화가 낯설다. 단순한 통상전쟁을 넘어 중국의 반도체 공세, 세계 경제 구조의 변화 등 복잡한 고차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위기가 절박한 체질 개선의 기회가 될 수 있도록 하루빨리 내부 역량을 결집해야 하는 이유다.김현수 경제부장 kimhs@donga.com}

    • 2025-03-0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광화문에서/김현수]계엄 사태의 또 다른 교훈… 리더는 ‘경청’해야 한다

    요즘 누구를 만나든 대화의 종착역은 12·3 비상계엄이다. 계엄이 초래한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타격 우려는 물론이고, 이 충격적 소식을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들었는지 개인적 경험을 나누게 된다. 더 나아가 ‘왜 똑똑하다는 이들이 이같이 터무니없는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한 심리적 분석에까지 이른다. 기업인들은 주로 ‘불통(不通)’과 ‘집단사고(groupthink)’의 폐해를 꼽았다. 집단사고는 집단 능력에 대한 과대평가로 객관성을 잃고, 집단 화합과 동조에 대한 열망으로 개인의 비판적 사고를 차단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말한다. 어빙 재니스 미 예일대 교수가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그의 똑똑한 참모들이 내린 재앙적 결정, 1961년 ‘피그만 침공’ 사건에 영감을 받아 1972년에 정립한 개념이다. 사석에서조차 듣기보다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진 윤석열 대통령의 개인적 스타일과 ‘인의 장막’ 속 집단사고가 만나 파국이 빚어졌다는 분석이다. 결국 누구나 자유롭게 비판적 의견을 내놓고, 이를 잘 듣는 리더가 중요하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말이 쉽지 실천은 매우 어렵다. 제왕적 리더십과 충실한 실행자로 이뤄진 한국적 조직문화는 더더욱 집단사고에 빠지기 쉽다. 최악의 의사결정 표본이 된 계엄 사태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 주요 기업에서도 나오는 이유다. 그래서 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는 ‘경청(傾聽)’이라고 쓴 액자를 늘 사무실에 걸어놓는다고 했다. 남의 말을 듣기 싫더라도 액자를 보며 되새기기 위해서다. 그는 “결국 내 판단으로 밀어붙일 때도 많지만 그럼에도 일단 들어 놓으면 마음 한편에 그 반대 의견을 항상 염두에 두게 된다. 다음 의사 결정에 반영하거나 조심해야 할 리스크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싫은 소리 하는 이를 옆에 두고, 싫어도 들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성공하는 리더십은 경청을 개인의 의지에 맡기지 않는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은 피그만 침공 실패 이후 ‘특정 안건에 대한 찬반보다 여러 대안을 내놓는 회의를 한다’, ‘대통령이 없는 자리에서 소그룹별로 토론한다’ 등 집단사고를 피하는 의사결정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한다. 덕분에 쿠바 미사일 위기에는 현명하게 대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 엔비디아 젠슨 황 CEO도 소통의 달인으로 꼽힌다. 올해 3월 엔비디아 본사에 가보니 엘리베이터는 건물 구석에 숨겨져 있다시피 했다. 그 대신 중앙에 각 층 카페와 이어진 계단으로 직원들이 이동하게끔 설계돼 있었다. 엔비디아 관계자는 반도체 개발 특성상 전문 분야에만 매몰되지 않도록 “억지로라도 계단에서 만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젠슨 황 CEO가 여기저기 불쑥불쑥 나타나서 ‘뭘 연구하느냐’고 묻고, 한참 듣고 가서 곤혹스럽다”는 개발자도 있었다. 알 수 없는 미래 기술에 투자하는 테크기업 특성상 경청 없인 치러야 할 대가가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최악의 의사결정으로 어마어마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비용을 치르고 있다. 누구든 경청의 파워를 뼈저리게 느낀 아주 비싼 수업료다.김현수 산업1부 차장 kimhs@donga.com}

    • 2024-12-1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광화문에서/김현수]철강 배터리 반도체 흔들… ‘슈퍼 디바이드’가 두렵다

    요즘 경북 포항이 심상치 않다. 지난달 포스코 포항제철소 제1선재공장과 현대제철 포항제2공장이 연달아 문을 닫았다. 포스코는 7월에도 포항 제강공장의 문을 닫은 적이 있다. 협력업체 여파까지 감안하면 지역경제 타격도 우려된다. 더 큰 문제는 탈출구가 안 보인다는 것이다. 철강 공장 폐쇄는 중국발 ‘치킨게임’이라는 구조적 원인 탓이다. 세계 철강 생산량의 55%를 차지하는 중국은 자국 건설 경기가 악화되자 세계 각지로 재고 떨이를 하고 있다. 독일 철강 기업 티센크루프스틸은 얼마 전 전체 직원의 40%에 해당하는 인력 1만1000명을 줄인다고 밝혔다. 근무 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나누더라도 웬만하면 감원을 피하는 독일도 속수무책인 것이다. 허리띠를 졸라매며 누가 더 오래 버티느냐의 전쟁이 심화되고 있다. 배터리 업계도 버티기 싸움 중이다. 초기 시장에서 주류 시장으로 넘어가기 전 일시적 수요 둔화를 뜻하는 ‘캐즘’만으로 현 위기를 설명하기 어렵다. 복잡한 지정학적 요인이 얽혀 있다. 탄소 절감에 진심이던 유럽은 배터리 자립 실패, 중국의 공세로 친환경차 정책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져 있다. 미국도 도널드 트럼프 차기 행정부의 등장으로 ‘전기차 구매 캠페인’ 같았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존치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그런데 이 같은 한국 주력 산업의 위기는 경제지표엔 잘 드러나지 않았다. 지난달까지 수출은 14개월 연속 증가했고, 1분기(1∼3월)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전년 동기 대비 3.4%, 2분기(4∼6월)엔 2.3%로 양호했다. 본보가 매출 100대 기업의 2분기 실적을 따져보니 총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5.3%, 영업이익은 무려 81.3% 늘었다. 지표는 왜 좋았을까. 우리 경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큰 탓이다. 반도체 경기가 좋으면 수출도 실적도 빛나 보인다. 100대 기업의 2분기 영업이익 증가분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90.2%였다. 반도체가 철강, 배터리, 석유화학, 항공, 유통 등 전 분야의 위기를 가린 것이다. 최근까지 국제통화기금(IMF) 고위직을 인터뷰하면 늘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결정짓는 요소로 반도체 경기를 꼽을 정도였다. 정부가 지표만 보고 낙관하는 사이 반도체와 나머지 산업의 경기는 ‘평행우주’처럼 따로 돌아갔다. 수출 호황으로 돌아가는 세계와 찬 바람만 부는 내수의 세계도 접점이 없었다. 투자와 수요가 특정 산업과 소수의 기업에 집중되고, 부의 낙수효과가 사라지는 ‘슈퍼 디바이드’ 현상이 심화한 것이다. 반도체 내부에서도 인공지능(AI)으로 갈라지는 슈퍼 디바이드 현상이 보인다. 엔비디아만 보고 전체 반도체가 호황이라 말할 수 없다. 아직 국내 소부장 업계는 일반 전자기기에 들어가는 범용 반도체 생태계에 주로 의지하고 있다. 구형 메모리 반도체는 중국의 공세에도 노출돼 소부장 업계는 “불황 수준”이라며 몸부림치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가 강해지는 내년에는 슈퍼 디바이드 현상이 더욱 도드라질 것이다. 극단적으로 갈라진 경제에서 전체 지표만 보고 낙관하다간 위기 대응에 나설 골든타임을 놓친다. 이미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산업계의 시름은 깊어지고 있다. 김현수 산업1부 차장 kimhs@donga.com}

    • 2024-12-03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광화문에서/김현수]美 대선 ‘눈치’ 억만장자… ‘큰 정부’의 시대가 온다

    “사업적 이익을 지키려면 ‘비겁함’이 합리적 행동이죠.” 테슬라 주식 매도를 외쳐 온 미 월가의 대표적 테슬라 회의론자 GLJ리서치 고든 존슨 애널리스트. 그는 최근 미 대선판에 끼어든 억만장자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와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의 행보를 두고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평했다. 머스크는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 선거 유세에 직접 뛰어들었고, 베이조스는 워싱턴포스트의 사주로서 신문의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선 후보 지지 선언을 막아 대선전의 한복판에 섰다. 존슨은 이들의 행보가 “사업적 이해관계 때문”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공개적으로 해리스 지지 선언을 한 CEO도 적지 않다. 스타벅스, 블랙스톤, 머크 경영진들은 “예측할 수 있는 경제 정책을 원한다”는 성명까지 내고 해리스 지지를 선언했다. 미 억만장자들의 대선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눈치 보기는 미국치고도 이례적이란 평가다. 뼛속부터 기업가인 이들은 어떤 이해관계로 미 대선을 바라보는 것일까. 머스크와 베이조스만 보면 이 둘은 묘하게 겹치는 사업이 많다. 둘 다 미국항공우주국(NASA)과의 협력과 지원이 필요한 우주 사업, 정부의 인프라 지원이 절실한 인공지능(AI) 기업을 운영한다. 이들이 대선전에 직간접으로 개입하면서 잃는 것도 많다. 한때 테슬라 차주들은 기후변화에 관심이 많은 민주당 성향 이미지가 있었지만 머스크가 트럼프를 지지하는 탓에 테슬라 브랜드 이미지도 흔들리고 있다. 베이조스는 전통의 워싱턴포스트 독자들로터 비난을 받는 데다 아마존 프라임 절독 캠페인 조짐도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정학적 리스크, 미 우선주의, 산업 전환에 따른 정부 파워가 커져 대선 눈치를 봐야 할 필요성이 커진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기업의 효율적 경영 판단이 중요했던 자유무역주의 시대가 끝나가고 보호무역주의 속에 ‘큰 정부’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신호탄인 셈이다. 예를 들어 머스크는 “관세(Tariffs)는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고 한 트럼프가 당선되면 중국 BYD의 미국 공습 작전을 피할 수 있다. 산업 전환 측면에서도 ‘큰 정부’가 부상하고 있다. AI, 자율주행, 전기차, 기후변화 등 미래 정책은 정부 보조금이나 전력망과 같은 정책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 미국이 파리 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당선 직후 재가입하며 글로벌 기업들의 탄소 배출 로드맵이 갈지자를 그렸던 사례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비단 미국 기업뿐 아니라 한국 산업계도 그 어느 때보다 미 대선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국내 배터리 업계 고위 관계자는 “한국 정치보다도 미국 대선이 더 관심사”라고 발언할 정도다. 미 우선주의와 산업 전환의 여파 속에 우리 4대그룹이 미국에 투자한 104조 원 규모의 투자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경기 위축으로 재계에선 미국 과잉투자 우려도 나오는 상황에서 누가 돼도 향후 투자 압박은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미 기업과 행정부의 결속, 자국 우선주의 속에 한국도 그 어느 때보다 민관 리더십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김현수 산업1부 차장 kimhs@donga.com}

    • 2024-11-0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광화문에서/김현수]‘공공’ 엔비디아 칩 확보… 선언으로 그쳐선 안된다

    국내 대학도, 기업도 고성능 인공지능(AI) 칩이 없어 연구개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한국 과학계를 대표하는 KAIST가 보유한 엔비디아의 고성능 AI칩 ‘H100’은 0개. 기업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국내 기업 1400여 곳이 가진 H100 개수를 모두 합쳐도 2000개뿐이었다. 최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조사와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한 내용이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MS)나 메타가 15만 개씩 가지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격차다. 미국에선 심지어 대학들도 한 개에 6000만 원씩이나 하는 H100 쇼핑을 경쟁적으로 하고 있다. 올해 하버드대가 400개, 프린스턴대가 300개를 구매한다고 발표했다. 왜 대학들도 나서서 AI칩 구매 계획을 발표할까. 인재 유치를 위해서다. 고성능 칩 보유량은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처리하는 대규모 데이터센터, 즉 컴퓨팅 자원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AI 개발에 필수적인 컴퓨팅 자원이 있어야 인재가 모이고, 이들이 시너지를 내면 더욱더 많은 투자를 받아 혁신적 성과를 낼 수 있다. 유럽 AI의 자부심이자 오픈AI 대항마로 떠오른 스타트업 ‘미스트랄 AI’도 유럽의 공공 AI 인프라 덕을 본 사례다. 지난해 창업 이후 1년 만에 최근 기업가치가 58억 달러(약 7조8000억 원)까지 뛴 이 회사는 생성형AI 모델 개발에 유럽 각국이 투자해 만든 슈퍼컴퓨터 ‘레오나르도’를 이용했다. 고성능 컴퓨팅 자원을 활용할 수 없었다면 미국 빅테크의 대항마 스타트업은 존재할 수 없었다는 의미다. 산업화 시대에 고속도로나 해운 같은 물류, 정유나 철강 같은 기간산업이 필수적이었다면 AI 시대에는 이처럼 새 인프라가 필요하다. AI 칩, 데이터, 전력, 인재 등이다. 문제는 AI 인프라 확충은 역대급 ‘쩐의 전쟁’이라는 점이다. 세계 AI 투자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인재를 싹쓸이한 미국과 중국이 AI 주요 2개국(G2)으로 떠오른 이유다. 오일머니를 앞세운 중동, 유럽 AI 맹주를 꿈꾸는 프랑스, AI 연구는 앞섰지만 상업화 동력이 떨어진 캐나다 등은 부족한 민간 여력을 국가가 채우며 G3라도 되겠다고 발벗고 나선 상태다. 우리 정부도 늦게나마 G3 도약을 선언하고 최근 국가인공지능위원회를 출범해 인프라 확대를 발표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H100 보유 수준을 15배까지 늘리고 4년 내 민간투자 65조 원을 독려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역대급 쩐의 전쟁에 필요한 총알, 즉 정부 예산이 보이지 않는다. 공공이 이용할 수 있는 AI 칩 기반 데이터센터는 누가 어디에 어떻게 지을지 아직 모르겠다. 반면 4월에 캐나다, 5월에 프랑스는 구체적 지원안과 더불어 AI 강국 도약을 선언했다. 특히 캐나다는 올해 예산에 2조 원 이상 AI 인프라 투자를 편성한 뒤 이를 발표했다. 인프라 투자 전쟁의 판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다. 기업가치 200조 원이 넘는 오픈AI마저 최근 미국 정부에 AI 인프라에 나서 줄 것을 요청할 정도다. 우리 정부도 G3 선언을 받침할 구체적 후속 법안이나 예산 지원, 세액 지원 등을 서둘러 추진해야 한다. 말뿐인 G3 도약은 아무런 힘이 없다. 김현수 산업1부 차장 kimhs@donga.com}

    • 2024-10-0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광화문에서/김현수]AI, 미 대선, 경기침체… 韓 흔드는 세 가지 키워드

    우리 시간으로 11일 오전, 태평양 넘어 미국에서 벌어지는 대통령선거 토론에 국내 주요 그룹 전략 담당자들은 동태를 주시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한 주요 기업 임원은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당선되면 보조금이 걸려 있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 유지될 가능성이 높아지겠지만 법인세 인상 가능성도 있고 고민해야 할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다”라고 토로했다. 미국 대선이라는 파도 외에 국내외 정치, 거시경제, 산업 수요 등이 모두 안갯속이라는 의미였다. 반도체와 자동차가 한국의 수출 효자 역할을 톡톡히 하며 지난달 수출이 579억 달러로 8월 기준 역대 최고치를 찍었지만, 삼성 SK 등 4대 그룹을 비롯한 주요 기업들의 우려는 더욱 깊어지는 모양새다. 실제로 전체 수출의 20%를 차지하는 반도체를 걷어내고 보면 실적이 나빠진 기업이 한둘이 아니다. 동아일보가 매출 100대 기업의 상반기(1∼6월) 반기보고서를 분석해 보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제외한 배터리, 철강, 항공부문 대표 기업들의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대폭 하락하고 있었다. 재계는 특히 해외발 ‘불확실성 폭풍’ 세 가지 변수로 미 대선, 경기침체, 인공지능(AI) 거품론을 꼽는다. 미 대선에서 민주당 공화당 대선 후보 중 누가 돼도 미 우선주의는 강화될 전망이다. 미 우선주의가 나오게 된 배경에는 중산층의 위기가 자리 잡고 있다. 중국산 저가 상품 봇물로 미 제조업이 흔들리자 중서부 노동자 계층의 불만이 커져 왔던 것이다. 향후 미국 투자 유치 압박, 중국과의 대치 국면은 강화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이미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104조 원 투자를 약속한 4대 그룹에 더 많은 투자 압박과 무역 규제가 뒤따를 수 있다. 글로벌 경기 둔화, 더 나아가 경기침체 조짐이 보이는 점도 우려스럽다. 세계 최대 시장 미국과 중국의 침체 우려로 글로벌 기업의 대규모 감원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대규모 감원은 세계 소비자들의 주머니가 얇아진다는 뜻이다. 이미 내수 경기가 얼어붙은 한국의 수출 기둥인 자동차, 스마트폰, 가전, TV 등마저 타격을 입을 수 있다. 고금리, 고물가에 불안했던 세계 경제를 굴러가게 한 AI 투자 붐마저 ‘거품론’ 논란 속 불확실성에 휘둘리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엔비디아를 비롯한 AI 관련 기업 주가가 급등했다가 다음 날 폭락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미 대선, 글로벌 경기침체, AI 투자 둔화는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후폭풍은 더욱 두렵다. 글로벌 경기침체가 오면 미 우선주의 압박은 더욱 강해질 것이고, 미중 갈등이 첨예해지면 AI발 ‘반도체의 봄’은 급격히 겨울로 치달을 것이다. 경기침체로 수출이 타격을 입을 때, 반도체에 기댈 수도 없게 된다. 반도체와 스마트폰, 가전 사업을 모두 거느린 삼성전자에 대해 국내 증권사들이 일제히 목표 주가를 하향 조정하기 시작한 이유다. 급박하게 거시 환경이 바뀌고 있지만 아직 정부나 정치권에선 체감하지 못하는 듯하다. 대표적으로 국내 경제 8단체가 한목소리로 최근 상법 개정안 등에 우려를 표하고 있지만 이내 묻히는 분위기다. 반도체법, 전력망 확충 등 뚜렷하게 나온 지원책도 없다. 폭풍이 오고 나서 대책을 논의하면 이미 늦는다. 김현수 산업1부 차장 kimhs@donga.com}

    • 2024-09-1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광화문에서/김현수]두고두고 남을 고물가 후폭풍… 물가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게 2만6000원이라고요?” 최근 서울 광화문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샐러드를 시켰다. 가격이 비싸 2인분 몫을 기대했지만 양이 터무니없이 적어 놀랐다. ‘미친 물가’로 악명 높은 미국 뉴욕에서 특파원 임기를 보내며 고물가에 시달릴 만큼 시달렸는데 3년 만에 돌아온 서울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과일 채소 값은 이 가격이 맞는지 여러 번 확인할 정도다. 얼마 전 온라인 다이어트 정보 영상에 출연한 한 의사가 “고기를 상추 여러 겹으로 싸먹으라”고 하자 갑자기 댓글창이 고물가 성토장으로 바뀌었다. ‘상추 여러 겹은 사치’라는 것이다. 폭우 탓에 지난달 상추값은 전달보다 170% 이상 폭등했다. ‘체감’ 물가와 지표상 물가의 괴리는 크다. 사실 물가상승률은 일부 채소 등을 제외하고 안정세다. 22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물가만 보면 목표 수준에 수렴한다는 확신을 좀 더 갖게 됐다”고 했다. 집값 상승 때문에 금리를 못 내려도 물가는 안정됐다는 것이다. 고강도 긴축으로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미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도 인플레이션과의 전쟁 종식을 선언하고 금리 인하 첫발을 내딜 준비가 돼 있다. 하지만 중앙은행의 종전 선언이 무색하게 일반 국민들의 물가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미 크게 오른 가격에선 낮은 상승률도 부담이다. 가격에는 이른바 심리적 저항선이라는 것이 있다. ‘5000원 커피’, ‘1만 원 냉면’, ‘2만 원 파스타’를 넘어서면 그만큼 거부감이 증폭된다. 고물가로 과거 생활 수준을 감당할 수 없고, 생계비에 짓눌리면 실질 고통도 커진다. 게다가 오랜 고금리 긴축 정책 끝에는 경기 둔화가 기다리고 있다. 고물가와 고금리에 따른 ‘생계비 위기’라는 후유증은 지표보다 강력하고 끈질기게 남을 것이다. 경제에 민심이 성이 나면 어김없이 포퓰리즘이 고개를 든다. 박빙의 미국 대선전에서 식품 기업 가격 통제가 화두로 떠오른 것이 대표적이다. 민주당 대선 후보로 상승세를 탄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제1호 경제공약으로 ‘바가지 가격(price gauging)’을 법으로 금지하겠다고 했다. 여론조사마다 물가에 대한 분노가 나오니 내놓은 공약이다. 하지만 법이 기업 이윤 중 탐욕과 적정이익을 구분해 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격 통제는 제품과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거나 시장 참여자를 줄여 종국엔 가격 폭등을 부르기도 한다. 성공한 전례가 매우 드문 이유다. 정치인들이 이를 모를 리 없지만 당장의 표가 더 중요한 것 같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도 야당이 전 국민에게 25만 원을 뿌리는 정책을 추진 중이다. 팬데믹 시기 공급이 위축된 와중에 전 세계가 돈을 풀어 수요를 자극했을 때 나타난 인플레이션 폭풍을 잊은 것일까. 고물가 고금리를 불러온 정책을 또다시 고물가의 대책으로 내세울 순 없다. 결국 물가 대책은 오래 걸리더라도 수요 공급 균형으로 풀 수밖에 없다. 기후변화나 전쟁, 무역장벽과 같은 변수로 이미 고물가는 장기전이 됐다. 경기까지 둔화돼 생계비 위기가 더욱 커질 때, 희한한 포퓰리즘의 유혹을 참는 것이 ‘물가 대책’의 첫 단추일 것이다. 김현수 산업1부 차장 kimhs@donga.com}

    • 2024-08-23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광화문에서/김현수]AI 거품론에 무용론까지… 실리콘밸리와 월가의 힘겨루기

    5일 오후 서울 전역에 천둥소리가 들렸다. 8%가 넘는 주가 폭락에 당황한 한국 ‘개미’들은 자연현상마저 “내 주식 계좌가 부서지는 소리”라며 아우성이었다. 공포스럽게 내려가던 주가는 6일이 되자 새벽 미국 뉴욕 증시 선물시장에서 반등 기미가 보이더니 한국과 일본 증시에서 기록적 상승률을 보였다. 시장이 대체 왜 이러는지 정확한 답을 알긴 어렵다. 최근 2년 동안 미국 고용이 나쁘면 증시는 환호했다. 경기가 식어야 인플레이션이 둔화돼 미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금리를 빨리 내릴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둔화된 고용지표에 갑자기 경기 침체 우려로 건너뛰더니 실제 지표보다 과한 공포감이 시장을 지배했다. ‘경제에 나쁜 뉴스=증시에 호재’ 내러티브가 깨진 것이다. ‘인공지능(AI)이 증시를 이끈다’는 내러티브도 깨졌다. 팬데믹 이후 금융을 대표하는 미 월가와 기술기업을 대표하는 실리콘밸리는 ‘절친’ 관계였다. 엔비디아나 구글 등 빅테크 기업들이 눈부신 실적을 내세우거나, 고용을 줄여서라도 AI 투자를 늘리겠다고 하면 월가는 박수를 보냈다. 미래 성장성이 뛰어난 7개 기술주를 ‘매그니피센트 세븐(M7)’이라며 띄운 것도 월가였다. 1960년대 영화 ‘황야의 7인’의 영어 제목에서 착안해 뱅크오브아메리카 애널리스트 마이클 하트넷이 지난해 대중화시켰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MS), 엔비디아, 구글(알파벳), 아마존, 메타, 테슬라를 일컫는다. 하지만 지난달 월가는 ‘AI가 생각보다 돈을 벌기 어렵고 투자가 과열됐다’며 AI 거품론을 꺼냈다. 불과 한 달 사이에 희망의 상징이었던 AI가 미래 효용성까지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헤지펀드사 엘리엇은 투자자들에게 “AI는 과장 광고였고 소프트웨어 개선 의미밖에 없다”고 경고했고, 불과 1년 전에 AI가 미래를 바꿀 것이라고 했던 골드만삭스는 최근 거품은 터지고야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여기에 MS, 아마존, 구글의 분기 실적이 기대에 못 미쳤다. ‘AI 거품론’ 내러티브가 대세가 된 것이다. 사실 실적 부진이라지만 M7 중 적자 기업은 없다. 시장은 ‘이 정도 주가를 지탱하려면 투자를 줄이든지 성과를 더 내라’는 것이다. 월가의 압박에 순다르 피차이 구글 최고경영자(CEO)는 “전환기에는 과잉 투자가 과소 투자보다 낫다”고 응수했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도 “너무 늦기보다는 필요하기 전에 역량을 구축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편이 낫다”고 했다. 실리콘밸리와 월가의 힘겨루기가 시작된 것이다. 누구 말이 맞을지는 시간이 답을 내려줄 것이다. 닷컴 버블 때도 그랬듯이 시장이 과열되면 언젠가는 터지기 마련이다. 스타트업 사명에 AI라는 말만 넣어도 투자가 몰리는 비이성적 과열이 감지됐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주가가 떨어진다고 우르르 AI 무용론까지 나가는 것은 무리가 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미래 기술 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업과 시장의 힘겨루기 속에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기업가 정신’이다. 누구도 답을 몰라 혼돈에 빠졌을 때 중심을 잡고 미래로 향해 가야 한다. 이미 글로벌 AI 가치사슬에 올라탄 한국 기업들도 흔들리지 않고 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 김현수 산업1부 차장 kimhs@donga.com}

    • 2024-08-0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미국發 ‘R’ 공포, 코스피 4년만에 최대 하락

    한국을 비롯한 글로벌 증시가 미국 경기 침체 공포의 직격탄을 맞으며 지수가 일제히 폭락하는 ‘검은 금요일’을 연출했다. 전날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9월 금리 인하를 사실상 예고하는 대형 호재가 있었지만 고용 등 미국의 경기지표가 예상보다 부진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하루 만에 시장 분위기가 급반전했다. 여기에 인공지능(AI) 산업과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에 대한 거품론까지 불거지면서 실물경제와 기업 실적이 생각보다 빨리 악화되고 있다는 불안감이 확산됐다. 2일 국내 증시에서 코스피는 전날보다 101.49포인트(3.65%) 하락한 2,676.19에 장을 마감했다. 코로나19가 처음 확산될 당시인 2020년 3월 19일(133.56포인트 하락) 이후 4년 4개월여 만에 최대 하락 폭이다. 코스닥도 4.20% 급락한 779.33에 거래를 마쳤다. 특히 미국 경기 침체 우려에 엔화가치 강세라는 악재까지 겹친 일본 닛케이평균주가는 이날 5.81% 폭락했다. 이날 하락 폭(2,216엔)은 ‘블랙 먼데이’로 불리는 1987년 10월 20일(3,836엔 하락) 이후 36년 10개월 만에 가장 컸다. 일본은 미국 등 세계 각국에 금리 인하 바람이 불고 있는 가운데, 최근 나 홀로 기준금리를 인상한 게 자국 경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했다. 이날 아시아 증시 급락은 전날 미국 경기 둔화 우려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결과다. 1일(현지 시간) 뉴욕 증시에서 나스닥 지수는 2.3%, 다우지수는 1.21% 각각 급락했다. 특히 반도체 관련 종목으로 구성된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는 7.14%나 떨어졌다. 미국 노동부가 2일 발표한 7월 비농업 일자리는 전월 대비 11만4000명 늘어 직전 12개월간의 평균 증가 폭(21만5명)에 크게 못 미쳤다. 또 7월 실업률은 4.3%로 2021년 10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 공급관리협회(ISM)가 발표한 7월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46.8로 전달보다 1.7포인트 하락했고, 시장 예상치(48.8)도 한참 밑돌았다. 경기 둔화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며 이른바 ‘공포 지수’로 불리는 시카고옵션거래소(CBOE) 변동성 지수(VIX)는 1일 장중 19.48까지 올라, 4월 19일 이후 3개월여 만에 가장 높았다. AI 거품론-美제조업 악화에 증시 출렁… 코스피 시총 78조 증발美 ‘R’의 공포, 금융시장 요동빅테크들 ‘어닝 미스’에 투자자 이탈… 美 실업수당 청구 건수 1년새 최고경착륙 공포, ‘금리인하’ 호재 삼켜… 삼성 4%-하이닉스 10% 주가 급락미국을 중심으로 세계 경제에 ‘R(Recession·경기 침체)의 공포’가 몰아닥치면서 글로벌 증시가 초토화됐다. 불과 하루 전날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금리 인하를 시사하며 시장이 반색했던 것과는 상반된 흐름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분위기가 급변한 것은 시장의 관심이 물가에서 경기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전에는 나쁜 경기지표가 나오면 연준이 금리를 서둘러 내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며 증시가 상승했지만, 이제는 그만큼 경제 사정이 좋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되며 시장에 공포감이 확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연준이 금리를 충분히 내려도 미국 경제의 경착륙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론마저 나타나는 상황이다.● AI 거품론에 반도체·빅테크 주가 급락 미국 경기에 대한 불안감의 요체는 그동안 미국 증시를 떠받들던 빅테크·인공지능(AI) 기업들의 실적 우려다. 시장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아온 빅테크들이 잇단 ‘어닝 미스’를 일으키는 등 AI 거품론이 일부 현실로 나타나자 투자자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은 1일(현지 시간) 2분기 매출이 1479억8000만 달러, 3분기 매출 전망치가 1540억∼1585억 달러라고 공개했다. 모두 시장 기대에 미치지 못한 수치다. 투자자의 실망감이 커지면서 아마존 주가는 실적 발표 직후 시간외거래에서 7% 급락했다. 브라이언 올사브스키 아마존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이날 “상반기에 데이터센터 등에 350억 달러를 지출했고, 하반기엔 그 금액을 더 늘릴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AI에 투자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든다는 시장의 인식을 증폭시켰다. 최근에는 마이크로소프트(MS) 실적도 기대를 밑돌았다. AI 수익과 직결된 MS의 클라우드 서비스 ‘애저’ 사업 부문의 매출 증가율은 29%로 시장 전망치(31%)에 미치지 못했다. 기업 실적이 받쳐주지 않는 상황에서 AI에 대한 과잉 투자는 향후 경기 침체가 확산될 때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우려를 키운 것이다. 실적에 대한 불안은 소비재 기업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앞서 맥도널드도 글로벌 소비가 둔화되며 2분기 매출이 전년 대비 1% 감소한 64억9000만 달러에 그쳤다고 밝혔다. 맥도널드의 매출이 줄어든 것은 팬데믹 기간이던 2020년 4분기 이후 3년 6개월 만에 처음이다. 1일 뉴욕 증시에서는 기술주 투매 현상이 이어져 엔비디아가 6.7%, 테슬라가 6.6% 하락했다. 미국 반도체주 폭락의 영향으로 2일 증시에서 삼성전자(―4.2%), SK하이닉스(―10.4%), 일본의 도쿄일렉트론(―12.0%) 주가도 일제히 급락했다. 코스피 전체 시가총액은 이날 하루 동안 78조 원 이상 증발했다. 30년 경력의 짐 코벨로 골드만삭스 기술주 담당 애널리스트는 최근 보고서에서 “AI 기술이 유용하게 사용되기엔 아직 한참 부족하다”며 “세상이 필요로 하지 않거나 준비가 되지 않은 것들을 과도하게 구축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다”고 경고했다.● 연준 금리 인하 속도 높일 수도 실물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도 증시를 짓누르고 있다. 미국의 제조업 경기를 나타내는 7월 구매관리자지수(PMI)는 시장 전망치(48.8)에 크게 못 미치는 46.8에 그쳤다. 이 지수는 50 이상이면 경기 확장, 이하면 경기 위축을 의미하는데 올 3월 이후 계속 50을 밑돌고 있다. 지난주 미국의 신규 실업수당 청구 건수도 24만9000건으로 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고용 시장도 차갑게 식었다. 경기 침체 공포가 확산하면서 미 국채 10년물 금리도 6개월 만에 처음 4% 아래로 떨어졌다. 시장에서는 연준이 급랭하는 경기에 대응하기 위해 금리 인하 속도를 높일 수도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2일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에 따르면 연준이 9월에 기준금리를 0.50%포인트 인하할 확률은 29.5%까지 뛰었다. 불과 하루 전에 비해 확률이 두 배 이상으로 오른 것이다. 일부 전문가는 연준이 7월에 선제적으로 금리를 내렸어야 했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여기에 미국 대선과 중동 전쟁 확전 등 지정학적 리스크까지 겹치면서 글로벌 증시의 변동성이 한동안 커질 수 있다고 본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그간 미 증시가 과도하게 오른 상황에서 조정 국면이 왔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동훈 기자 dhlee@donga.com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 2024-08-03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바이든, 인지력 검사 거부… 사퇴론 더 거세져

    지난달 미국 대선 TV토론에서 고령 논란을 재점화시킨 조 바이든 대통령(82)이 인지기능 검사 요청을 거부했다. 토론 뒤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바이든 대통령이 이를 잠재우려 인터뷰에 나섰지만 오히려 더 악재가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은 5일(현지 시간) ABC방송 인터뷰에서 “인지기능 검사를 받겠느냐”는 3차례 질문에 모두 거부 의사를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매일 (대통령으로 일하며) 검사받고 있는 셈”이라며 “선거운동은 물론 세상을 운영하고 있다”고 맞섰다. 바이든 대통령은 토론 참패에 대해 “나쁜 밤이었을 뿐”이라며 “당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검사를 받을 정도로 상태가 별로였다”고 했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WP)는 “검사 거부는 의학적이든 정치적이든 명백한 실수”라며 “4년 더 일할 수 있다는 확신을 원하는 유권자를 모욕했다”고 지적했다. 사전 녹음 뒤 4일 방영된 바이든 대통령의 라디오 인터뷰 2건에 대해 바이든 캠프가 진행자들에게 미리 질문지를 전달했다는 WP 보도도 논란이다. 바이든 캠프 측은 “일상적인 일”이라고 반박했지만 바이든 대통령의 인지 능력에 대한 의심을 더 키웠다는 분석이 많다. ‘神만이 날 물러나게 할수 있다’는 바이든… 사퇴 압박은 커져[바이든 사퇴 압박]ABC방송 인터뷰서 인지검사 거부… 라디오 인터뷰는 사전 질문서 논란민주 상-하원 의원 사퇴 논의 확산… 유세장선 “포기해달라” 팻말 시위대“전능하신 주님이 ‘대선 경주에서 물러나라’고 하면 사퇴하겠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5일(현지 시간) 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하며 대선 후보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음을 또다시 밝혔다. ‘신의 개입’ 정도는 있어야 사퇴할 수 있다는 취지로 강하게 완주 의사를 밝혔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인지기능 검사 받는 것을 거부했다. 또 사전 녹음 뒤 4일 방송된 지역 라디오와의 인터뷰 2건(위스콘신주 매디슨의 시빅미디어,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WURD)에서는 바이든 선거 캠프에서 질문지를 미리 진행자들에게 전달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보도해 논란이 일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자신의 업무 수행 능력을 둘러싼 우려를 잠재우려 하고 있지만 이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 커지는 모양새다.● “주님이 사퇴하라면 한다” 완주 의지 지난달 27일 진행된 TV토론에서 참패한 뒤 바이든 대통령은 연일 유세와 민주당 관계자들과의 만남에 나서고 있다. 그는 5일에도 접전지인 위스콘신주 매디슨을 찾아 “40세처럼 보이지 않느냐”며 자신이 건강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유세 뒤 편집 없이 22분간 진행된 A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시절 백악관 대변인을 지낸 조지 스테퍼노펄러스 앵커가 “인지기능 검사를 받겠느냐”고 세 차례 물었을 때 모두 거부 의사를 밝혔다. 검사를 받아 논란을 잠재우기보다 이를 피하는 모습을 보인 것. 스테퍼노펄러스가 “당신이 너무 나이가 많아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미국인의 수가 2020년 이후 두 배로 늘었다. 재선이 더 어렵지 않겠느냐”고 묻자 바이든 대통령은 “병적인 거짓말쟁이를 상대로 선거를 치를 때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TV토론 이후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더 밀리고 있다’, ‘지지율 36% 대통령이 재선한 것을 본 적이 없다’는 질문에도 그는 “여론조사 데이터가 예전만큼 정확하지 않다”며 “나만큼 트럼프 전 대통령을 이길 수 있는 적임자는 없다”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민주당 상하원 지도자들이 사퇴를 건의한다면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질문에는 “그들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미 상-하원 민주당 의원 사퇴 관련 논의” 바이든 대통령은 사퇴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민주당 내 사퇴 논의는 확산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와 NBC방송에 따르면 하킴 제프리스 하원 원내대표는 7일 민주당 소속 고위급 하원 의원들과 화상 회의를 열고 바이든 대통령 후보직의 미래를 논의하기로 했다. 상원에서도 사퇴 압박 논의 조짐이 있다. WP는 버지니아주 마크 워너 상원의원이 사퇴 요청을 위해 의원들의 의견을 모으고 있다고 전했다. 민주당 소속 주지사 중에서는 모라 힐리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처음으로 사퇴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 기부자들 반응도 냉담해지고 있다. 민주당 ‘큰손’ 기부자인 억만장자 릭 카루소를 비롯해 넷플릭스 창립자 리드 헤이스팅스와 디즈니 상속인 애비게일 디즈니도 새로운 후보가 지명될 때까지 지원을 중단한다고 밝힌 바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매디슨 유세장 밖에서 “그만 포기해 달라”는 팻말을 든 시위대가 등장하는 등 유권자들의 사퇴 압박 여론도 커지고 있다. 뉴욕에 사는 한 민주당 지지자는 “오후 8시면 자야 하는 미국 대통령은 말이 안 된다”며 “후보직을 유지하는 것은 미국에 대한 배신”이라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 같은 압박 속에 7일 격전지인 펜실베이니아주 유세에 나섰다. 이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 참석해 국제무대에서도 고령 논란을 돌파해야 한다. 한편 CNN 등 일부 언론이 ‘민주당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행보에도 관심이 쏠린다. 해리스 부통령은 6일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열린 ‘에센스 뮤직 페스티벌’에 비욘세의 공연과 더불어 깜짝 등장하며 트럼프 전 대통령을 저격했지만 바이든 대통령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 2024-07-0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美연준, 9월 금리 인하땐 ‘바이든 우군’ 될수도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강력한 우군’이 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뜨거웠던 미 고용 시장이 최근 식어가고 있다는 지표가 나오며, 연준이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 경쟁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9월 기준금리 인하’에 나설 것이란 전망에 무게가 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 노동부는 5일(현지 시간) 6월 미국 비농업부문 전월 대비 신규 고용 수가 20만6000명이라고 밝혔다. 시장 전망치(20만 명)에 대체로 부합한 수치다. 또 실업률은 2년 1개월 만에 최고치인 4.1%를 기록해 시장 전망(4.0%)을 웃돌았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여러 차례 미국의 뜨거운 고용 상황이 인플레이션을 상승시키는 요인이라고 언급해 왔다. 하지만 고용 시장이 냉각되면 인플레이션 둔화의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에 시장에선 기준금리 9월 인하설에 대한 기대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시카고상품거래소 페드워치에 따르면 금리 선물 투자자들은 9월 인하 가능성을 7일 현재 약 78%로 평가한다. 5일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지수와 나스닥지수도 최고치를 경신했다. 연준이 대선 전 기준금리를 내리면 악재가 거듭되던 바이든 선거 캠프도 숨통을 틔울 수 있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바이든 대통령 측은 대선 전 금리가 인하될 것이란 기대를 잃어가고 있었지만 6월에 먼저 공개된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 발표 이후로 이어진 낭보 덕에 희망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전했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 2024-07-0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美 ‘100년 라이벌’ 명품 백화점 2곳 합친다

    미국에서 ‘100년 라이벌 관계’를 유지해온 명품 백화점 두 곳이 합병된다. 명품 시장 둔화와 오프라인 점포의 영향력 감소 속에 생존을 위해 경쟁사 간 합병이 진행된 것이다. 명품 쇼핑 거리로 유명한 뉴욕 5번가에 본점이 있는 ‘삭스 피프스 애비뉴’의 모기업인 허드슨스베이컴퍼니(HBC)는 라이벌 백화점 ‘니먼 마커스’를 26억5000만 달러(약 3조7000억 원)에 인수한다고 3일(현지 시간) 밝혔다. 이번 거래에는 아마존과 세일스포스 등 빅테크 기업도 참여했고, 이들은 합병사의 지분을 보유하게 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니먼 마커스가 파산 신청을 하자 양 사의 합병 논의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팬데믹이 종료된 뒤에도 고물가 속에 소비자들이 고가 명품에 대한 지출을 줄이고, 루이뷔통모에에네시(LVMH) 같은 명품 기업이 티파니, 리모와 등 굵직한 브랜드를 인수하며 직접 소비 판매에 나서자 명품 백화점의 입지는 좁아지는 추세였다. 리처드 베이커 HBC 최고경영자(CEO)는 뉴욕타임스(NYT) 인터뷰에서 “니먼 마커스 인수를 통해 세계 최고의 영업인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기쁘다”며 “명품 판매에는 아름다운 매장과 신뢰할 만한 직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합병을 통해 두 회사의 연간 매출은 약 100억 달러(약 13조82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삭스 피프스 애비뉴는 1924년, 뉴욕 5번가가 고급 저택으로 둘러싸여 있던 시절에 설립됐다. 1899년에 역시 5번가에 자리 잡은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 1923년 인근 매디슨가 ‘바니스 뉴욕’과 더불어 뉴욕 5번가 명품 쇼핑 시대를 연 주인공이다. 니먼 마커스는 1907년 텍사스주에서 창업돼 점포를 확장하며 1972년 버그도프 굿맨을 인수하고 미 전역에서 삭스 피프스 애비뉴와 경쟁을 벌여 왔다. 하지만 온라인 쇼핑의 등장, 팬데믹, 거대 명품 기업의 탄생 등으로 바니스와 니먼 마커스는 2020년에 나란히 파산했다. 삭스 피프스 애비뉴는 바니스 브랜드 라이선스를 인수한 데 이어 니먼 마커스 인수로 100년 경쟁의 승리자가 됐다. NYT는 “명품 유통 시장이 온·오프라인 모두 흔들리는 가운데 삭스 피프스 애비뉴의 니먼 마커스 인수는 명품 유통 지형을 바꿀 것”이라고 분석했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 2024-07-0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美 독립기념일 연휴 7000만명 대이동… 인플레 둔화로 ‘자동차 여행’ 다시 활기

    4일 미국 독립기념일을 전후로 역대 최대 인원이 여행길에 오를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미국자동차협회(AAA)는 지난달 29일부터 독립기념일 주간이 있는 7일까지 9일 동안 약 7090만 명이 집에서 최소 50마일(약 80km) 이상 이동할 것으로 분석됐다고 밝혔다. 미국 인구가 약 3억4200만 명인 것을 감안할 때 5명 중 1명이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2022년 휘발유 값 급등 이후 주춤했던 자동차 여행이 미 인플레이션 둔화로 다시 활발해짐에 따라 여행객도 늘어난 것이란 분석이다. AAA 측은 “여름휴가가 본격화되고 원격 근무가 늘어 독립기념일 전후로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미국인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번 독립기념일인 4일은 목요일이라 금요일 하루 휴가를 내고 4∼7일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분위기다. 미 뉴욕에 사는 코트니 새들러 씨(37)는 “초등 아이들도 방학이라 나이아가라 폭포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며 “편도 7시간 이상 거리지만 작년, 재작년보다 휘발유 값이 떨어져 부담은 덜하다”고 말했다. 비행기를 이용한 여행객도 신기록을 세울 것으로 전망된다. AAA는 작년보다 7% 증가한 574만 명이 7월 4일 비행기로 여행을 떠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AAA 예약 데이터에 따르면 이번 독립기념일 주간 미 국내선 항공료는 2023년에 비해 2% 저렴하며, 국내선 왕복 항공권의 평균 가격은 800달러로 나타났다. 하지만 여행을 놓고 양극화가 더 심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 증시 랠리로 소득이 늘어난 중산층은 여행 소비를 늘리고 있지만, 고물가에 가처분 소득이 줄어든 저소득층은 여름휴가 자체를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더글러스 공항에서 근무하는 라숀다 바버 씨(42)는 뉴욕타임스(NYT)에 “시간당 19달러, 주당 40시간을 일하지만 가파르게 오른 주택 임차료나 식료품비로 쓰고 나면 남는 게 많지 않다”며 “가족 휴가를 다녀온 지 몇 년이 지났다”고 말했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 2024-07-0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100년 라이벌’ 美 명품 백화점 합친다…삭스, 니만 마커스 인수

    미국에서 ‘100년 라이벌 관계’를 유지해온 명품 백화점 두 곳이 합병된다. 명품 시장 둔화와 오프라인 점포의 영향력 감소 속에 생존을 위해 경쟁사 간 합병이 진행된 것이다.명품 쇼핑 거리로 유명한 뉴욕 5번가에 본점이 있는 ‘삭스 피프스 애비뉴’의 모기업인 허드슨스 베이 컴퍼니(HBC)는 라이벌 백화점 ‘니만 마커스’를 26억5000만 달러(3조7000억 원)에 인수한다고 3일(현지시간) 밝혔다. 이번 거래에는 아마존과 세일스포스 등 빅테크 기업도 참여했고, 이들은 합병사의 지분을 보유하게 된다.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니만 마커스가 파산신청을 하자 양사의 합병 논의는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팬데믹이 종료된 뒤에도 고물가 속에 소비자들이 고가 명품에 대한 지출을 줄이고,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같은 명품 기업이 티파니, 리모와 등 굵직한 브랜드를 인수하며 직접 소비 판매에 나서자 명품 백화점의 입지는 좁아지는 추세였다. 리처드 베이커 HBC 최고경영자(CEO)는 뉴욕타임스(NYT) 인터뷰에서 “니만 마커스 인수를 통해 세계 최고의 영업인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기쁘다”며 “명품 판매에는 아름다운 매장과 신뢰할만한 직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합병을 통해 두 회사의 연간 매출은 약 100억 달러(13조8200억 원)에 달할 전망이다. 삭스 피프스 애비뉴는 1924년, 뉴욕 5번가가 고급 저택으로 둘러쌓여 있던 시절에 설립됐다. 1899년에 역시 5번가에 자리잡은 ‘버그도프 굿만’ 백화점, 1923년 인근 매디슨가 ‘바니스 뉴욕’과 더불어 뉴욕 5번가 명품 쇼핑 시대를 연 주인공이다. 니만 마커스는 1907년 텍사스주에서 창업돼 점포를 확장하며 1972년 버그도프 굿만을 인수하며 미 전역에서 삭스 피프스 애비뉴와 경쟁을 벌여 왔다. 하지만 온라인 쇼핑의 등장, 팬데믹, 거대 명품 기업의 탄생 등으로 바니스와 니만 마커스는 2020년에 나란히 파산했다. 삭스 피프스 애비뉴는 바니스 브랜드 라이선스를 인수한데 이어 니만 마커스 인수로 100년 경쟁의 승리자가 됐다. NYT는 “명품 유통 시장이 온-오프라인 모두 흔들리는 가운데 삭스 피프스 애비뉴의 니만 마커스 인수는 명품유통 지형을 바꿀 것”이라고 분석했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 2024-07-04
    • 좋아요
    • 코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