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집주인 횡포 막아라” 주택난에 성난 부산 민중들이…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25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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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8월 7일


플래시백
주택 및 토지 임대료를 40% 낮추고, 계약해지 시에는 각각 3개월, 1년 전에 통보하라!

‘택지·가옥 임차법’을 제정해 지주와 집주인의 횡포를 막아라!

노동자 및 공무원용으로 시영주택 150채를 신축하라!

심각한 주택난에 시달리던 부산 민중들이 1921년 8월 25일 부산시민대회에 참가해 구제책을 요구하는 모습. 대회장인 부산청년회관이 꽉 차 군중들이 장외까지 빽빽하게 모여 있다.
심각한 주택난에 시달리던 부산 민중들이 1921년 8월 25일 부산시민대회에 참가해 구제책을 요구하는 모습. 대회장인 부산청년회관이 꽉 차 군중들이 장외까지 빽빽하게 모여 있다.
주택난에 시달리던 성난 부산 민중들이 1921년 8월 25일 열린 시민대회에서 결의한 요구사항들입니다. 마치 오늘날 집 없는 서민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주택난은 심각한 사회문제였습니다.

당시 부산에서는 인구가 늘어나며 부동산 가격이 상승할 조짐이 보이자 대부분의 시가지를 독과점하고 있던 일본인 대지주들이 땅을 그러쥐고 더 오르기를 기다렸습니다. 간혹 사겠다는 사람이 나오면 시가의 4, 5배를 불렀다고 합니다. 여기에 부산부(府)는 도시정비에 나서 도로를 낸다, 관공서를 짓는다, 혹은 풍치를 손상한다 해 낡은 조선인 주택들을 헐기 시작했습니다. 자연히 집이 부족해졌고, 집세가 폭등했습니다. 서민들은 도심에서 쫓겨나 초가를 짓고 살아야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주택난을 이겨내지 못한 서민들은 도심 외곽에 토막을 짓고 비바람을 피해야 했다. 사진은 경성 송월동에 형성된 토막촌.
일제강점기 주택난을 이겨내지 못한 서민들은 도심 외곽에 토막을 짓고 비바람을 피해야 했다. 사진은 경성 송월동에 형성된 토막촌.
그러자 동아일보 창립발기인으로 초대 부산지국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안희제, 역시 부산지국장을 역임하고 사회주의운동에 투신한 김종범 등 뜻있는 부산 유지들은 ‘부산주택난구제기성회’를 설립하고 시민대회를 열어 당국에 대책을 촉구했습니다. 동아일보는 8월 7일자 ‘부산부의 주택난’에서 서민들의 어려움을 보도한 뒤 27일자에는 2000여 명이 참가한 부산시민대회, 그 다음날엔 시민대회 결의사항을 지면에 실어 여론을 이끌었습니다. 그러자 부산 상업회의소는 그 해 10월 12일 개막한 조선총독부 산업정책 자문기구 전선(全鮮) 상의연합회에 주택난 구제를 위한 저리자금 공급을 의안으로 발의하기도 했습니다.

주택난은 비단 부산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수많은 농민들이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어 경성 대구 평양 등 대도시는 집이 크게 부족해졌습니다. 1920년 25만 명가량이었던 경성의 인구는 1925년 30만3000여 명, 1930년 35만5000여 명으로 증가했는데 이들이 살 집은 거의 신축되지 않아 만성적인 초과수요 상태가 됐고, 1~2원 하던 초가 한 칸 월세는 1922년에는 5원까지 거침없이 올랐습니다.

집 없는 설움은 일본인보다 조선 사람들이 훨씬 더 컸습니다. 1921년 9월 10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경성부가 그 해 4월 현재 시내 가옥을 조사한 결과 조선인은 4만7927가구인데 집은 1만6830채에 그칩니다. 무려 65%가 무주택 가구인 셈입니다. 반면 경성에 살던 일본인은 1만6414가구, 1만2378채로 무주택 가구 비율이 25%에 불과합니다.

서민들이 모여 살던 토막촌은 일제의 도시정비로 번듯한 ‘문화주택’에 자리를 내주기 일쑤였다. 1931년 1월 14일자 동아일보는 ‘지척이 천리’라는 제목으로 문화주택과 오두막집이 공존하는 현상을 만화로 그려냈다. 일본 노랫가락이 흘러나오는 문화주택과 굶주린 어린애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오두막집의 정경이 대조적이다.
서민들이 모여 살던 토막촌은 일제의 도시정비로 번듯한 ‘문화주택’에 자리를 내주기 일쑤였다. 1931년 1월 14일자 동아일보는 ‘지척이 천리’라는 제목으로 문화주택과 오두막집이 공존하는 현상을 만화로 그려냈다. 일본 노랫가락이 흘러나오는 문화주택과 굶주린 어린애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오두막집의 정경이 대조적이다.
무작정 상경해 지게를 지고 인력거를 끌면서 생계를 이어가던 우리 농민들은 비바람이라도 피하려면 공터를 찾아 무허가 움막인 ‘토막’을 지어야 했습니다. 지금 서울의 신당동, 창신동, 도화동, 청파동 등지는 당시 토막촌으로 유명한 곳이었죠. 하지만 이마저도 끊임없이 위협받습니다. 일제는 도시정비 등을 이유로 토막촌을 철거하고 이곳에 번듯한 ‘문화주택’을 대규모로 건설합니다.

의도적 방화인지 실화(失火)인지 알 수 없지만 토막촌에는 유난히 불도 자주 났습니다. 1935년 2월엔 창신동 토막촌에 불이 나 일가족 8명이 숨지거나 화상을 입은 참사가 일어났는데 동아일보는 유족의 딱한 사정을 취재해 ‘토막은 차가운 잿더미가 되고 돈 없어 입원도 못해’라는 제목으로 보도해 온정을 호소했습니다. 다들 어려운 처지였지만 50전, 1원이라도 도우려는 손길이 이어졌고, 결국 유족들은 성금 200원(현재가치로 약 230만 원)으로 새 집을 장만할 수 있었습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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