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나라 잃은 동아일보 기자, 세계기자대회 부회장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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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년 7월 28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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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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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9월 중순 동아일보에 초청장 하나가 날아들었습니다. 만국기자대회 회장이자 미국 미주리대 신문학과장인 월터 윌리엄스가 발송한 것이었죠. 다음달 11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기자대회에 대표를 보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창간한지 1년 6개월도 되지 않은, 그것도 식민지의 신문에 보내온 초청장에 임직원들은 깜짝 놀랐죠.

동아일보는 중역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대표 파견! 결정을 내렸죠. 국제회의인 만국기자대회가 지정해 대표를 요청한 것은 동아일보의 명예이자 조선 언론계 전체의 영광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나라 잃은 민족이 국가의 대표 자격으로 초청받았다는 점도 흥분할 요인이었죠. 여권을 내주지 않으려는 총독부에 주필 장덕수가 찾아가 담판 끝에 받아낸 것도 흥분의 연장이었습니다. 출장비도 2000원으로 정했죠. 지금 2500만 원이 넘는 돈입니다.

동아일보 1921년 9월 27일자 3면에 실린 조사부장 김동성의 
얼굴사진(왼쪽)과 그가 타고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에 갈 기선 고려환(高麗丸‧오른쪽). 해당 지면 사진설명에는 고려환을 ‘코리아號’로 표기했다. 김동성은 고려인으로 고려환을 타게 된 것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고 출장기에 썼다.
동아일보 1921년 9월 27일자 3면에 실린 조사부장 김동성의 얼굴사진(왼쪽)과 그가 타고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에 갈 기선 고려환(高麗丸‧오른쪽). 해당 지면 사진설명에는 고려환을 ‘코리아號’로 표기했다. 김동성은 고려인으로 고려환을 타게 된 것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고 출장기에 썼다.


대표는 당시 조사부장이던 김동성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동아일보에 국내 최초 4컷 만화 ‘그림이야기’를 그린 바로 천리구(千里駒) 김동성이죠. 그는 7년 간 미국에서 공부해 영어가 유창했습니다. 동아일보는 9월 27일자 3면에 김동성 얼굴사진과 그가 타고 갈 여객선 사진까지 넣은 ‘만국기자대회에 아사 대표 참가’ 기사를 실었죠. 9월 28일자와 10월 18일자에는 사설을 각각 게재했습니다. 기자대회가 무슨 결정권한은 없지만 여론이 실제 문제를 좌우하므로 언론인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취지였습니다.

그가 출발한 지 한 달이 채 안 돼 이번에는 특급전보가 날아왔습니다. 김동성이 대회 부회장으로 당선됐다는 통지문이었죠. 세계 각국에서 줄잡아 200명이 참석한 국제회의의 부회장이라는 겁니다. 참석만으로도 의의가 있던 만국기자대회에서 전해진 뜻밖의 이 소식을 동아일보는 10월 23일자 3면 머리기사로 전했죠. 명예회장인 미국 대통령 워런 하딩과 회장으로 재선된 윌리엄스, 김동성 세 사람의 얼굴 사진도 넣어서요. 알아주는 사람 없던 조선 언론계가 세계로 뻗어나간 쾌거라고 알리는 지면이었죠. 경축 사설도 실었습니다.

동아일보 1921년 10월 24일자 1면 광고. 동아일보 대표가 만국기자대회
 부회장으로 당선된 것을 축하한다는 ‘쪽광고’ 모음이었다. 광고를 통해서도 나라 잃은 조선의 기자가 세계기자대회의 부회장이 됐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다.
동아일보 1921년 10월 24일자 1면 광고. 동아일보 대표가 만국기자대회 부회장으로 당선된 것을 축하한다는 ‘쪽광고’ 모음이었다. 광고를 통해서도 나라 잃은 조선의 기자가 세계기자대회의 부회장이 됐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다.


사실 만국기자대회 부회장은 각국 대표 한 명씩에게 주는 당연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김동성에게는 부회장 자리가 쉽게 돌아오지 않았죠. ‘조선은 국가가 아니므로 부회장을 줄 수 없다’는 분위기가 우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찬가지 처지인 인도 필리핀 아일랜드 대표에게는 주지 않았느냐’ 반론이 나왔죠. 특히 일본 도쿄아사히신문 기자 스기무라 소진칸 등이 적극 반론했다고 합니다. 제국과 식민지의 차이를 뛰어넘은 기자들만의 연대였을 겁니다. 그 덕분에 나라 잃은 조선의 기자가 어렵사리 부회장이 된 것이죠.

동아일보는 광고로도 이 경사를 알렸습니다. 10월 24일, 25일자 이틀간 총 7개면에 ‘축 동아일보사 대표 만국기자대회 부회장 당선’ 문패 아래 축하 광고를 실었죠. 경축 사설은 물론 경축 광고까지 실은 것은 김동성의 부회장 피선이 근대 신문 창간 이후 최대의 경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아일보 지방 지국들은 이와 관련된 강연회와 음악회 운동회 등을 열어 잔치 분위기를 이어갔죠.

만국기자대회가 의결해 조선신문업계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도착한 조사위원 
6명이 1921년 11월 28일 동아일보를 방문해 기념사진을 찍었다(왼쪽). 이들은 조선 신문기자단체인 무명회의 초대로 11월 
29일 명월관에서 만찬을 함께 했다(오른쪽). 조사위원들은 귀국해 조선 신문지법과 단속규칙이 가혹하고 신문 경영도 어렵다고 지적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만국기자대회가 의결해 조선신문업계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도착한 조사위원 6명이 1921년 11월 28일 동아일보를 방문해 기념사진을 찍었다(왼쪽). 이들은 조선 신문기자단체인 무명회의 초대로 11월 29일 명월관에서 만찬을 함께 했다(오른쪽). 조사위원들은 귀국해 조선 신문지법과 단속규칙이 가혹하고 신문 경영도 어렵다고 지적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김동성은 11월 21일자부터 출장기 ‘포와행(布哇行)’을 5회 연재했습니다. 포와는 일본식 한자 표기입니다. 각국 대표석 가운데 ‘코리아’ 이름표를 보고 울컥 했다고 합니다. 일정 중 힐로항에서는 환영객 중 조선동포 수십 명을 만나 손을 맞잡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죠. 20년 전 사탕수수 노동자로 건너간 동포들이었습니다. 김동성은 하와이 여기저기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조국의 형편을 설명하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민간외교관 역할도 했죠. 그런데 김동성은 출장 막바지에 독단적인 행동을 저지릅니다. 무슨 일이었을까요?

이진 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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