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100년 전 청년의 꿈으로 다시 ‘젊은 100년’ 열어가겠습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1일 03시 00분


코멘트

―가장 오랜 신문 아닌 가장 새로운 신문으로―

동아일보는 100년 전 오늘, 나라 잃은 민족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하며 창간됐습니다. 망국(亡國)의 황량한 터에서 태어나 광복, 분단, 전쟁, 가난과의 싸움, 독재와의 투쟁을 겪었습니다. 길고 험한 길 성원해 주시고, 또 질책해 주신 독자와 국민 여러분이 없었다면 한 세기의 동아일보는 없었을 것입니다.

100년 전 8개 면으로 만들어진 동아일보 창간호를 손에 쥔 “서울의 시민들 가운데는 거리를 뛰어다니며 ‘동아일보 만세’를 외치는 이들도 있었다”(국어학자 일석 이희승)고 합니다.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 때 시민들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 실상을 앞장서 보도하는 동아일보 기자와 취재 차량이 가는 곳마다 박수와 환호로 격려해 줬습니다. 1974년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다가 정권의 탄압으로 광고 해약 사태를 겪었을 때는 텅 빈 광고 지면을 독자들이 채워 주셨습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보도를 주도해 6월 민주항쟁의 물꼬를 틀 수 있었던 것도 국민의 민주화 열망 덕분입니다.

다시 새로운 100년을 열어 나갈 오늘, 100년 전 창간의 주역이었던 청년들을 생각합니다. 창립자이자 발기인 대표였던 인촌 김성수는 당시 29세였습니다. 인촌과 함께한 창간의 주역들 모두 신학문을 배운 청년들이었습니다. 국권(國權)을 빼앗긴 일제 암흑기였지만 청년들은 민족독립과 민주주의에의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꿈은 ‘민중의 표현기관’ ‘민주주의 지지’ ‘문화주의 제창’이라는 3대 사시(社是)로 압축됐습니다.

‘조선 민중’을 대변코자 했던 청년들의 꿈은 독립과 건국에의 열망이었고, 마침내 현실이 됐습니다. 엄혹한 식민통치에도 우리의 민족혼은 이어졌고, 광복 후엔 극심한 좌우 대립과 혼돈 속에서도 대한민국을 건국했습니다. 그 숱한 역사의 고비마다 동아일보가 나침반 역할을 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은 창간 주역들이 품었던 민족 자주(自主)라는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던 식민 치하에서 청년들이 품었던 민주주의에의 꿈 역시 이뤄졌습니다. 우리 국민은 장기집권과 군부독재 등 권력의 역류를 이겨내고 민주혁명을 이뤄냈습니다. 그러나 그 민주주의가 다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100년 전부터 그래왔듯, 동아일보는 진정한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독자와 국민과 함께 나아갈 것입니다.

봉건적 남녀차별이 횡행하고 남녀유별(男女有別)이 강조되던 1923년, 동아일보는 국내 최초의 여성 스포츠 행사인 ‘전조선여자연식정구대회’를 열었습니다. 남들보다 수십 년을 앞서 ‘문화주의’라는 꿈을 꾸지 않았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우리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휩쓸고, 방탄소년단(BTS)을 비롯해 한국의 젊은이들이 세계 청소년을 매혹시키고 있습니다. 변방의 작은 나라에서 세계 문화의 주류를 뒤흔드는 문화강국으로 자라난 오늘의 성취는 100년 전 청년들의 꿈이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시대를 앞선 비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변화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지만, 사람과 사람이 모여 국가라는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는 일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100년 전 창간 주역들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그리고 미래의 동아일보가 품을 꿈의 본질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꿈은 바로 ‘더 나은 미래’, 즉 우리 아이들이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을 앞당길 수 있도록 사회적 공기(公器)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대안도 함께 제시하겠습니다.

지금 언론이 위기라지만 그럴수록 언론의 역할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가짜뉴스의 범람은 누구나 쉽게 뉴스의 발신자가 될 수 있는 인터넷 시대의 어두운 면입니다. 하지만 가짜뉴스나 풍문, 궤변은 결코 팩트(사실)를 이길 수 없습니다. 단단한 팩트를 찾고 알리기 위해 부지런히 뛰겠습니다. 100년간 쌓아온 한국 대표 신문으로서의 권위와 역량을 토대로 ‘무엇이 진짜 뉴스인지 궁금할 때면 눈을 들어 동아일보를 보라’고 말할 수 있는 준거(準據) 신문이 될 것입니다.

동아일보 사옥은 대한민국의 중심부인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 있습니다. 일제 때 조선총독부를 감시한다는 상징적 의미로 이곳에 터를 잡았고, 지금은 청와대가 보입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이곳에서 권력을 감시하고, 광화문광장의 함성을 들으며, 광장에 미치지 못하는 작은 목소리까지 귀 기울이겠습니다. 성숙한 자유민주주의와 상식이 통하는 정치가 뿌리내리도록 불편부당(不偏不黨) 시시비비(是是非非)의 자세를 지켜 가겠습니다.

100년의 역사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창간 2주 만에 첫 발매 금지를 당한 후 1940년 8월 강제 폐간되기까지 무려 63회의 발매 금지, 489회의 압수, 2400여 회의 기사 삭제, 4회의 정간을 겪었습니다. 마지막 정간은 9개월여간 이어졌는데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웠다는 이유였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권력에 눌려 목소리를 내지 못한 시민의 대변자 역할을 했습니다. 앞으로도 그것이 정치권력이든, 권력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세력이든 자신의 주장을 펴기 위해 남의 입을 막는, 어떠한 외압에도 분연히 맞서고 비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 군국주의의 광기가 극에 달했던 일제 말 강제폐간을 앞둔 시기, 조선총독부의 집요한 압박으로 저들의 요구가 반영된 지면이 제작된 것은 100년 동아일보의 아픔입니다.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다시 위기입니다. 무엇보다 요즘은 전 세계적인 감염병 사태로 온 국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미증유(未曾有)의 복합 위기는 국민과 정부가 하나가 돼 나아갈 때만 극복할 수 있습니다. 국민의 통합과 민의(民意)를 존중하는 정부의 구현을 위해 100년의 둔필(鈍筆)을 다시 날카롭게 갈겠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우리는 이번에도 이겨낼 것입니다.

새로운 100년의 출발점에 서서, 동아일보는 가장 오랜 신문사가 아니라 가장 젊은 신문이 되고자 합니다. 100년 전 당시로서는 첨단기업이었던 신문사를 설립한 그 도전 정신으로 다시 혁신의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겠습니다. 동아일보의 100년을 가능케 한 것은 국민들의 성원이었고, 그 성원은 100년 전 창간 주역들이 품었던 꿈과 열정이 국민의 지지와 공감을 받았기에 가능했습니다. 앞으로 100년도 독자와 국민 여러분과 함께 꿈을 꾸고 열정을 나눠 가겠습니다.
#동아일보#창간 100주년#젊은 100년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