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이 기업 주도형 벤처캐피털(CVC) 시장에 뛰어들며 스타트업 투자에 속도를 낸 다. 지난해 설립한 창업보육 전문기업 롯데액셀러레이터에 벤처캐피털 영역을 더함으로써 롯데는 스타트업의 발굴, 보육, 투자의 전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15일 롯데그룹에 따르면 롯데액셀러레이터는 최근 이사회를 열고 신기술사업금융회사(신기사)로 전환하기로 결의했다. 이는 창업투자회사(창투사)에 비해 자본금 진입 장벽은 높지만 투자 범위가 넓어 대기업 계열 벤처 투자사들이 선호하는 형태다. 롯데는 이달 말 금융감독원에 등록 신청을 할 예정이다. 7월경 등록 절차가 완료되면 계열사별로 출자한 300억 원 규모의 펀드를 운용할 계획이다.
삼성 등 정보기술(IT) 대기업의 벤처투자는 활발했지만 전통적인 유통그룹이 본격적인 CVC 시장에 뛰어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GS홈쇼핑도 2009년부터 사내 벤처팀을 통해 스타트업 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지만 금융사업자로 분사를 계획하고 있진 않다.
이진성 롯데액셀러레이터 대표는 “스타트업 지원은 사회공헌활동(CSR)인 줄 알았지만 일을 해보니 대기업에 가치를 더해 주는 공유가치창출(CSV)에 가까웠다. 그룹 사업과의 시너지, 재무적 성과에 대한 기대 등으로 계열사들이 자발적으로 펀드에 투자하겠다고 전해왔다”고 말했다.
○ 한국의 ‘와이콤비네이터’ 꿈꾼다
“와이콤비네이터 아세요? 그런 걸 한번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롯데그룹 내에서 스타트업 지원 아이디어를 가장 먼저 꺼낸 사람은 신동빈 회장이었다. 2015년 8월 신 회장은 그룹의 미래전략연구소에 창업보육 기업을 구상해 달라고 주문했다. 외부에서 혁신을 찾고, 일종의 사회공헌 활동도 겸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와이콤비네이터는 ‘에어비앤비’ ‘드롭박스’를 발굴한 미국 최대 액셀러레이터다. 액셀러레이터는 초기 단계의 스타트업에 소액의 창업 지원금을 지원하고 경영 컨설팅, 멘토링, 벤처캐피털(VC)과의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기업을 말한다.
롯데는 이왕 스타트업 생태계에 뛰어든 길에 ‘롯데’의 옷을 벗기로 했다. 롯데그룹 본사가 있는 서울 중구 소공동에서 떨어진 강남구 테헤란로 인근 빌딩을 빌렸다. 롯데액셀러레이터의 직원 8명 중 롯데 공채 출신은 한 명밖에 없다. 실무를 총괄하는 김영덕 상무는 G마켓 창업 멤버 출신이다. 롯데 관계자는 “이제 벤처 투자에 나설 벤처캐피털리스트도 고용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롯데액셀러레이터는 설립 후 1년 3개월여 동안 40여 개 스타트업에 각각 초기 자금 2000만∼5000만 원, 사무 공간 임대 및 경영 멘토링을 지원했다. 스타트업의 보육에 초점을 맞춘 와이콤비네이터 모델에 충실한 셈이다. ‘데모데이’를 열어 투자자와 연계할 수 있는 장도 마련했다. 올 하반기(7∼12월)부터 직접 펀드를 운용하게 되면 기업당 5억∼15억 원까지 투자금을 확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사회공헌인 줄 알았는데 대기업도 윈윈
액셀러레이터를 통해 스타트업과 교류하면서 롯데도 신선한 자극을 받고 있다. 계열사 최고경영자(CEO)와 임원이 지원 스타트업에 실질적 조언을 주면서 오히려 영감을 얻기도 했다. 롯데 내 사내벤처에도 외부 스타트업의 열정은 자극제가 됐다.
롯데액셀러레이터의 이 대표는 “창업자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관료화된 대기업에는 젊은 피가 수혈되는 효과가 있다. 이 모든 게 잘되면 국가 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롯데 사업과의 시너지 효과도 컸다. 비가청음(非可聽音)파를 활용한 간편결제 시스템을 개발한 ‘모비두’의 경우 롯데멤버스가 함께 사업화에 나서고 있다. 최근 글로벌 기업이 CVC 설립에 적극적인 것도 이 같은 오픈 이노베이션의 필요성 때문이다. 국내 기업도 CVC 투자를 확대하고 있지만 아직 규제의 장벽은 높은 편이다. 대기업이 스타트업 지분을 30% 이상 보유하면 인수된 스타트업은 대기업 계열사로 편입된다. 공시 의무 등 대기업집단 규제를 받는 것이다. 한 CVC 관계자는 “30%를 넘지 않으려고 29.9%만 투자하는 대기업도 있다. 대기업 집단에 편입되면 각종 규제가 생겨 스타트업 입장에서 오히려 어려움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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