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식 민주정치, 신뢰 무너졌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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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셧다운에 ‘美 소프트 파워’ 흔들
초당정치 아닌 극한정치 표본 전락…동맹국 원조 등 약속 이행 지연
대외정책에 대한 믿음도 깨져

연방정부 잠정 폐쇄(셧다운)로 미국의 ‘설득 리더십’인 아메리칸 소프트 파워가 흔들리고 있다.

국제무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온 미국의 외교적 신뢰도와 협상력에 제동이 걸리면서 지도력에 상처를 입었다. 특히 국내 정치에 발이 묶여 대외적인 약속 이행에 어려움을 겪는 미국적인 시스템에 대한 회의감마저 세계 곳곳에서 고조되는 형국이다. 그동안 가장 선진적인 정치 시스템으로 불려온 미국판 민주주의가 치명타를 입었다는 점에서 당장 눈에 보이지 않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막대한 손실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국제무대에서의 신뢰도 하락

미국 소프트 파워의 위기는 국제 외교 무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 원조금 지원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예산 집행이 동결되면서 1일로 예정됐던 2014년 회계연도분 32억 달러(약 3조4290억 원)가 이스라엘에 전달되지 못한 것. 마리 하프 미 국무부 부대변인은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다른 동맹국에 대한 원조도 지연될 수 있다”고 밝혔다. 군사원조금 지원 자체는 부국강병과 관련된 범주인 ‘하드 파워’ 영역에 속하지만 국가 간 약속 불이행으로 미국이 국가적 신뢰를 잃음으로써 소프트 파워 영역에서도 직격탄을 맞고 있는 셈이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유럽연합(EU)과 미국의 자유무역협정(FTA)도 셧다운 복병에 휘청거리고 있다. 7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시작될 예정이던 미-EU FTA 2라운드 협상도 셧다운으로 전격 취소됐다. 카렐 데 휘흐트 EU 통상담당집행위원은 4일 미 측이 협상을 취소한 사실을 전하면서 조속한 협상 진행을 위한 양측의 의지만큼은 확고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시사주간지 타임 최신호는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날이 올 수 있다는 의구심이 동맹국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고 진단했다. 지난달 29일 3박 4일 일정으로 방한한 척 헤이글 미 국방장관도 셧다운으로 미국의 군사력이나 안보 공약에 당장 변화가 오진 않겠지만 이에 대한 신뢰도에는 ‘암운’이 드리웠다고 우려했다.

소프트 파워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한 미 정치학자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최근 자신의 트위터에 “셧다운에 이어 부채 한도 협상마저 결렬되면 미국의 소프트 파워는 더욱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으로 내다봤다.

○ 흔들리는 미국판 민주주의

이번 셧다운으로 가장 큰 치명타를 입은 것은 미국판 민주주의 그 자체라는 지적도 나온다. 국가적 위기 때마다 “‘초당정치(bipartisanship)’의 모범을 보여 온 미국이 ‘극한정치(brinkmanship)’의 표본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존 딜러리 아시아소사이어티 미중연구소장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번 사태는 가장 민주적인 결과물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식 민주정치 체제의 가장 어두운 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진단했다. 영국 시사주간 이코노미스트 최근호는 커버스토리를 통해 “자유의 나라가 제어 불가능한 나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고 비판했다.

그 빈자리를 중국이 차지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저개발국은 물론이고 ‘재스민 혁명’ 이후 여전히 격변기를 보내고 있는 이집트 리비아 등 중동 국가 사이에선 시장경제와 반민주정권을 병행하는 일명 ‘차이나 모델’에 대한 매력지수가 상대적으로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딜러리 소장은 “정책 결정 과정에 보다 효율적이고 신속한 중국의 정치체제를 옹호하는 이들은 이번 셧다운 사태를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는 계기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찰스 쿱찬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은 “(미국 정치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우려가) 장기적 안목에서 중국이냐 미국이냐를 두고 고심하는 동아시아 국가들에는 매우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언 브레진스키 전 미 국방부 부차관보는 “셧다운은 미국의 경쟁국이나 도전국에 자신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정안 기자 jkim@donga.com
#미국 셧다운#미 소프트 파워#연방정부 폐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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