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인 저를 죽이려 했다는 아내를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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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 남편 눈물의 법정 탄원
재판부, 배심원 의견 반영 집유선고

‘피고인석’에 앉은 한 할머니의 등 뒤로 ‘빔 프로젝터’가 불을 비췄다. 화면에 등장한 할아버지는 자신의 집 소파에 앉아 어눌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제 처가 (저를) 죽이려고 했다는데 그 말은 개의치 마시고 제 처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들이 남은 인생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영상 속 할아버지의 이마에는 상처가 선명했다. 할머니는 30초가량의 짧은 동영상을 차마 쳐다보지 못한 채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눈시울이 뜨거워진 배심원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14일 서울남부지법 형사합의11부(부장판사 김기영)가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한 이 재판은 오전 11시 반부터 오후 8시 20분까지 이어졌다.

부인 이모 씨(71)는 지난해 11월 10일 밤 서울 강서구 공항동 자신의 집에서 치매에 걸린 남편 전모 씨(81)의 이마를 3.3kg짜리 변압기로 수차례 내려찍어 살해하려 한 혐의(살인미수)로 재판에 넘겨졌다.

▶본보 2012년 12월 17일자 A12면 “치매 남편과 살기 힘들어” 70대 할머니가 살해 시도

부인 이 씨와 남편 전 씨는 50년 전에 결혼했다. 평범했던 결혼생활은 6년 전 남편이 알츠하이머병(치매)에 걸리면서 피폐하게 바뀌었다. 이 씨는 남편의 손을 잡고 병원에 다니는 등 극진히 보살폈지만 소용없었다. 명절에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전 씨는 “네 어미가 다른 남자 만나고 돌아다닌다”며 이 씨에게 욕설을 해댔다.

이 씨가 물리치료를 받고 온 사건 당일에도 전 씨는 욕설을 하며 ‘누굴 만나고 왔냐’고 따졌다. 남편이 잠들자 이 씨는 현관 신발장에서 하얀 면장갑을 끼고 철제 변압기를 꺼내 남편의 머리를 찍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남편이 잠에서 깨고 이마의 피가 입을 적시자 놀란 이 씨는 범행을 멈췄다. 하지만 이마저도 남편은 기억하지 못했다. 이 씨는 ‘강도가 들었다’며 신고했지만 거짓말은 금세 들통 났다.

변호사는 “남편을 살해할 의도는 없이 혼내주기 위해 했던 행동”이라며 “죽일 수도 있었지만 스스로 멈춘 점을 감안해 달라”고 호소했다. 검사가 이 씨에게 살해 동기와 방법을 추궁할 때마다 이 씨는 “잘못했어요.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라는 말을 반복하며 “그동안 남편에게 맞고만 지내서 화가 치밀었어요”라고 말했다. 검사는 “변압기로 남편을 수차례 내리쳐 살해의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며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구형했다.

배심원들은 이 씨가 남편을 살해할 고의는 없었다고 보고 상해죄만 인정했다. 재판부는 배심원들의 의견을 존중해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김성모·김성규 기자 m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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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치매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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