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5세대 지도부 인물-리더십 집중탐구]<4>장더장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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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1기 권력서열 3위… 北유학 거친 장쩌민의 남자, 한반도 관련 보폭 커질듯

대표적인 북한통인 장더장 중국 공산당 신임 상무위원(가운데 넥타이 맨 사람)이 지난해 7월 북-중우호조약 체결 50주년을 맞아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앞)에게 가져온 선물을 소개하고 있다. 김 위원장 왼쪽 뒤편에 김정은이 서 있다. 동아일보DB
대표적인 북한통인 장더장 중국 공산당 신임 상무위원(가운데 넥타이 맨 사람)이 지난해 7월 북-중우호조약 체결 50주년을 맞아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앞)에게 가져온 선물을 소개하고 있다. 김 위원장 왼쪽 뒤편에 김정은이 서 있다. 동아일보DB
《장더장(張德江) 신임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은 ‘시진핑(習近平) 1기 지도부’에서 권력 서열 3위로 내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국인대·한국의 국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될 예정이다. 중국 공산당은 17기까지만 해도 ‘전국인대 상무위원장(한국의 국회의장)’을 권력 서열 2위로 했으나 18기부터 국무원 총리와 서열을 바꿨다. 장 상무위원은 올해 3월 보시라이(薄熙來·전 충칭·重慶 시 서기) 사태가 터졌을 때 충칭 시 서기로 긴급 투입됐다. 당 지도부가 그를 사태 수습용으로 낙점한 것은 그만큼 신뢰하고 있으며 배경이 든든하다는 방증이다.》

상하이 관료 출신이 아니면서도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이끄는 상하이방(上海幇)의 책사 역할을 했을 정도로 정치 감각이 뛰어나다. 현 정치국 위원(25명) 중 유일한 해외 유학파인 그는 북한통이기도 하다.

○ 조선족이 키운 북한 전문가

1946년 11월 랴오닝(遼寧) 성 타이안(臺安)에서 지난(濟南)군구 포병 부사령관을 지낸 장쯔이(張志毅) 소장(한국의 준장에 해당)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인민해방군 포병부대를 창설한 주역 중 한 명이다. 장더장이 태자당(혁명 원로 자녀 그룹)과 가까운 이유다.

지린(吉林) 성 창춘(長春)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68년 11월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 왕칭(汪淸) 현 뤄쯔거우(羅子溝)로 하방(下放)됐다. 그의 인생에서 첫 변곡점을 맞은 게 이때였다. 조선족 최초로 중국에서 각료를 지낸 이덕수(李德洙·69) 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만난 것.

왕칭 현 당위원회 상무위원이던 이덕수는 그를 왕칭 현의 선전조 간사로 천거했다. 이어 1972년 청강생 자격으로 옌볜대에서 공부할 수 있게 했다. 대학에서 조선어를 전공한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1978년 북한 김일성종합대 교환학생을 신청해 2년간 경제학을 공부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같은 과 후배가 된 셈이다. 이 경력은 평생의 밑천이 됐다.

1983년 3월 옌볜 자치주 서기였던 이덕수는 유학에서 돌아온 장더장을 옌지(延吉) 시 부서기로 발탁했다. 이때부터 중앙지도부의 눈에 들기 시작해 1985년 옌볜 자치주 부서기, 1986년 국무원 민정부(행정안전부에 해당) 부부장에 오르는 출세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 장쩌민의 후광

장더장 상무위원(오른쪽)이 지린 성 옌볜 조선족자치주 서기로 있던 1991년 1월 옌지 시를 찾은 장쩌민 총서기를 수행하는 모습. 사진 출처 바이두
장더장 상무위원(오른쪽)이 지린 성 옌볜 조선족자치주 서기로 있던 1991년 1월 옌지 시를 찾은 장쩌민 총서기를 수행하는 모습. 사진 출처 바이두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를 계기로 당 총서기에 오른 장쩌민은 이듬해 3월 첫 해외 방문지로 북한을 택했다. 수행단에 포함됐던 장더장은 유창한 이북 사투리를 구사해 북-중 양측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장쩌민은 그해 10월 그를 옌볜 주 서기로 임명해 대북 창구 역할을 맡기는 등 두터운 신임을 보여 줬다. 장쩌민은 1991년 1월에는 직접 옌볜을 찾아 격려하기도 했다.

장쩌민의 후광에 힘입은 그는 1992년 당 중앙후보위원에 뽑힌 데 이어 1997년부터 내리 3번 연속 중앙위원으로, 2002년부터는 2회 연속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는 탄탄한 경력을 쌓았다. 장더장은 저장 성 서기로 있던 2002년 항저우(杭州)에 시찰 온 장쩌민과 함께 이탈리아 가곡 ‘오 솔레미오’를 번갈아 불러 마치 부자(父子)와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호사가들은 이를 빗대 장더장의 이름 앞뒤를 바꿔 ‘江德張’이라며 장쩌민의 성을 붙이기도 한다.

이런 연유로 장더장이 2002년 처음 중앙정치국 위원에 올랐을 때 5년 뒤에는 당연히 최고 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시진핑 리커창이 부상하면서 5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 광둥 성에서의 시련

장더장
장더장을 말할 때면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게 광둥(廣東) 성 성장 재직(2002년 11월∼2007년 12월) 당시 중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련의 사건들이다.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8분의 1, 무역액의 3분의 1을 자랑하는 광둥 성은 ‘지린 성 촌뜨기’에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가 부임한 이듬해 3월 후베이(湖北) 성에서 온 농민공 쑨즈강(孫志剛·당시 27세)이 임시거류증을 휴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수용됐다가 간수들에게 맞아 숨졌다. 또 그해 11월 지역신문인 난팡(南方)도시보가 광저우에서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발생했지만 당국이 이를 숨겨 왔다고 폭로해 퇴진 운동까지 벌어졌다.

당시 현지인들은 “근묵자흑 근주자적(近墨者黑 近朱者赤)이라더니 세계에서 가장 사악하고 무뢰한 북한에서 유학해 (장더장이 우리 말은 안 듣고) 자기 방식만 고집한다”며 비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신문 기자들과 책임자를 횡령과 탈세 혐의로 해직하는 방식으로 정면 대응했다. 그러나 2005년 12월 베이장(北江) 강 카드뮴 오염 사건과 같은 달 산웨이(汕尾) 시 시위대 발포 사망(14명) 사건으로 언론에서 파면설까지 거론하는 혹독한 시련도 겪어야 했다.

○ 한반도 문제 직간접 관여할 듯

북한 전문가인 장 상무위원은 한반도 문제에 적잖은 발언권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 총서기와도 관계가 좋아 태자당(太子黨)과 상하이방의 가교 역할을 할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장 상무위원은 2007년 시 부주석의 부친 시중쉰(習仲勳)의 전기에 서문을 쓰기도 했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방중할 때마다 영접을 전담했다. 지난해 7월에는 북-중 우호조약 체결 50주년을 맞아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은 물론 김정은을 만나고 왔다. 작년 말 김정일 영결식 때도 중국에서 장 상무위원을 파견한다는 말이 나왔었다. 시진핑 체제에서도 북한의 전략적 중요성이 여전한 만큼 한반도 문제에서 장 상무위원의 행보가 특히 주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1992년엔 옌볜 자치주 경제시찰단을 인솔하고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부인 신수썬(辛樹森·63)은 산둥(山東) 성 하이양(海陽) 출신으로 4대 국유은행인 건설은행 부행장을 지냈다.

베이징=고기정 특파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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