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소송 2심 ‘흡연-폐암 인과관계 인정’ 의미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2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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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암환자측 결론선 졌지만 승소 발판 마련”

2007년 1월의 1심 판결과 2011년 2월의 항소심 판결의 결론은 같았다. 담배의 유해성을 둘러싼 ‘12년 전쟁’에서 또다시 폐암 환자 측은 KT&G 측에 졌다. 하지만 판결 내용은 많이 달랐다. 4년 전 1심 판결은 흡연과 폐암 발병 간의 개별적 인과관계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폐암에 걸린 것이 꼭 담배를 피웠기 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항소심은 흡연 때문에 폐암에 걸렸다는 점을 인정했다. 나아가 “앞으로 별개 소송에서 담배회사 측의 추가 불법행위가 인정되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밝혀 유사 소송에선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취지의 언급까지 했다. 최근 수년 사이 금연 문화가 급속히 확산된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법조계에선 ‘폐암 환자 측이 앞으로 승소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진일보한 판결’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 ‘폐암의 직접 원인은 흡연’ 일부 인정


담배 소송의 가장 큰 쟁점은 폐암의 발병 원인과 흡연의 인과관계였다. 폐암환자들이 승소하려면 KT&G가 담배를 제조하는 과정에 불법행위가 있었고 이 담배를 피운 까닭에 폐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1심 재판부는 흡연과 폐암 발병 사이에 역학적 인과관계는 인정되지만 이 사건 원고들의 폐암 원인을 흡연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었다. 흡연이 폐암에 영향을 미친다는 통계적 연관성은 인정되지만 유전적 요인이나 생활습관, 환경오염 등 다른 원인에 의해서도 폐암에 걸릴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항소심에서는 우선 KT&G가 독점적으로 제조해 생산하는 담배를 제조물책임법이 적용되는 ‘제조물’로 보았다. 고도의 기술이 집약돼 대량생산되는 제품은 제조업자만이 생산과정을 알기 때문에 제품의 결함 유무를 소비자가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어려운 만큼 이를 입증할 책임을 완화해 준 것이다.

이 같은 전제에서 항소심 재판부는 원고들에게 발병한 폐암이 일반적인 폐암과 비교해 흡연과 연관성이 높다는 점을 일부만 증명해도 된다고 판단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고령의 남성으로 젊은 나이에 흡연을 시작해 30년 이상의 흡연 기간에 하루 1갑씩 20년을 피웠고 △폐암 진단을 받을 때까지 담배를 피웠으며 △흡연과 연관성이 더 깊은 편평세포암이나 소세포암이 발병한 것이 증명된 방모 씨 등 폐암 환자 4명에 대해선 발병 원인이 흡연이라고 봤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입증할 책임은 KT&G 쪽에 있다고 밝혔다.

○ “KT&G 불법행위 인정은 어려워”


그러면서도 KT&G에 배상책임이 없다고 판단한 것은 KT&G가 담배를 만드는 과정에서 불법을 저질렀다는 점이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담배에 발암물질인 타르와 의존증을 유발하는 니코틴이 포함돼 있지만 이는 아직까지는 국내에서 법률적, 사회적으로 허용된 것”이라며 “이런 사정만으로 담배에 결함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또 원고 측은 “1976년 이전에 담뱃갑에 경고 문구를 표기하지 않은 것은 표시상 결함”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흡연의 위험성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 수준이나 미성년자에게 담배 판매를 금지하는 법체계 등을 고려하면 담배회사의 책임이 인정되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니코틴 역시 의존증을 유발할 수 있지만 흡연은 결국 당사자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다.

한편 폐암 환자들이 제기한 담배 소송과 별도로 담뱃불 화재를 둘러싼 소송도 진행 중이다. 2009년 경기도가 KT&G를 상대로 ‘담뱃불 화재로 인한 소방재정 손실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낸 것. 담뱃불 화재는 안전기술을 적용하지 않은 제조물 결함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2005년부터 입은 재정손실 규모만 1000억 원이 넘고 이는 담배회사의 책임이라는 주장이다. KT&G 측은 “방재비용은 국가 공공경비로 민사소송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설령 담뱃불로 인한 화재를 인정하더라도 이는 흡연자가 책임질 일”이라고 맞서고 있다.

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




▼ 원고측 “증거 숨기는데 위법성 어떻게 증명하나” ▼
KT&G “첨가물은 영업비밀… 공개요구 수용못해”


“1년에 5만50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담배는 대량살상무기보다 더 강한 무기입니다. 30년 뒤 국민이 다 죽고 나서 배상 책임을 인정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15일 서울고법이 ‘담배 소송’ 항소심에서 ‘담배회사의 불법성이 입증되지 않아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결하자 원고 측 법률대리인인 배금자 변호사(50·여)는 “흡연과 폐암의 인과관계를 인정하면서 불법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은 이해할 수 없다”며 “판결문을 검토한 뒤 대법원에 상고할지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배 변호사는 “담배회사의 위법성을 입증하려고 해도 KT&G는 600여 종의 첨가물 중 240종만 공개했다. 증거를 숨기는데 어떻게 입증하겠느냐”며 “살인행위는 있었으나 살인자는 잘못이 없다는 말과 똑같은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한국금연운동협의회 서홍관 회장도 “법원의 판결은 국민의 생명권을 외면하고 KT&G의 부도덕하고 무분별한 판촉행위에 면죄부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 회장은 “다행인 것은 흡연과 폐암의 개별적 인과관계를 인정해 앞으로 담배회사의 불법성을 입증하는 소송 여지를 남겨 놨다”며 “2차 소송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KT&G 측은 법원 판결을 존중한다고 밝히면서도 재판부가 흡연과 폐암의 개별적 인과관계를 처음으로 인정한 데 대해선 우려를 나타냈다. KT&G 측 법률대리인 박교선 변호사(47·법무법인 세종)는 “폐암은 원인을 특정하기 어렵고 흡연 때문에 폐암에 걸렸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며 “재판부가 역학적 인과관계만으로 개별적 인과관계까지 인정한 것은 잘못”이라고 반박했다. 이어 “첨가물을 모두 공개하라고 하는 것은 기업의 영업비밀을 공개하라는 것과 똑같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2009년부터 이 사건을 심리해온 항소심 재판부의 성기문 부장판사(58·사법시험 23회) 등 3명의 판사는 모두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한편 소송에 참여했던 폐암환자 7명은 재판이 10년 넘게 진행되는 사이에 6명이 세상을 떠났고 방모 씨 1명만 생존해 있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 선진국의 소송 사례 ▼
“흡연 중독성-위험 감췄다”… ‘담배회사 책임’ 판결 늘어


미국에서도 1950년대부터 담배회사를 상대로 한 소비자들의 소송이 이어져 왔지만 1994년까지 원고가 승소한 경우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하지만 1995년 이후에는 전체 담배소송에서 원고가 승소하거나 합의가 이루어진 경우가 절반을 넘어섰다. 담배회사들이 흡연의 중독성과 위험성을 알고도 감췄다는 내부 정보가 잇따라 폭로되면서 담배회사에 과실이나 제조 책임을 묻는 판결이 늘어나는 추세다.

선진국은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기 전에 담배 경고 문구뿐 아니라 금연구역 확대, 담뱃값 인상 등 강력한 금연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유럽연합(EU) 가입 국가들은 담뱃갑 앞뒷면 50%에 건강경고 42개 및 문구당 3종류의 그림을 넣어 흡연에 따른 경고를 표시하고 있다.

싱가포르 캐나다 호주 등에선 담뱃갑 겉면에 흡연했을 때 인체에 유발할 수 있는 질환 및 증상에 대해 그림과 함께 강력한 경고 문구를 넣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 브라질 태국 등도 강력한 금연정책에 가세하고 있다. 브라질의 경우 담뱃갑 앞뒷면 100%에 경고문 및 그림을 표시하는 정책을 쓴다.

스웨덴, 영국, 아일랜드 등은 먹는 금연치료제에 보험금을 지급하는 등 금연치료에 건강보험을 적용하고 있다.

흡연 비흡연 구역을 아예 두지 않고 전면적으로 금연 구역으로 만든 곳도 많다. 영국에선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걸리면 흡연자와 사업주 모두 벌금형에 처해질 정도로 엄격하다. 반면 싱가포르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시아 지역에선 일정 면적이 넘어서는 건물은 흡연 구역과 비흡연 구역으로 나누는 정도로 느슨한 금연정책을 펴고 있다.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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