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아침 한류스타 박용하의 사망 소식을 접하는 순간 어떤 안타까움과 아쉬움, 아픔의 표현은 더 이상 부질없어 보였다.
경찰은 이날 오후 브리핑에서 박용하가 생전 “사업활동 및 새로운 사업 구상, 연예 활동을 병행하는 데 따른 스트레스”로 고통을 겪었고, 이 때문에 “술을 마시고 충동적”으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 추정했다. 또 경찰에 따르면 박용하는 “일도, 이 생활도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한다. 생전 “혼자 소주를 마시니 좋다”며 번잡한 주변의 시선에서 잠시 놓여나 스스로를 위로하는 모습도 드러냈다.
결국 그는 혼자였던 것일까. 스스로 견뎌낼 수 없을 만큼 그를 괴롭힌 “일과 생활”의 “스트레스”의 무게는 그토록 무거웠던 것일까. 박용하보다 먼저 세상의 팬들과 이별한 스타들에게도 그 무게는 마찬가지의 고통이었을 터, 자신의 목숨을 저버리는 극단적 행위로 얻고 싶었던 위안은 무엇이었을까.
가수들은 많은 인터뷰에서 “무대 위 조명이 꺼지고 텅 빈 객석에서 외로움을 읽는다”고 했다. 배우들은 작품 속 자신의 캐릭터 속에서 한동안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곤 한다. 그들의 열정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절실하게 다가올 수 없는 말들이다.
어느 직업군의 사람들보다 감성적이고, 그래서 더욱 여리며, 그래서 더욱 상처받기 쉬운, 그래서 더욱 외로운 그들.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출구 앞에서 대중은 모를 아픔으로 헤매고 있을 그들. 그래도 그런 열정으로 왜 남은 인생을 스스로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안타까움은 채 내버릴 수 없다.
여전히 대중은 건강한 스타를 원한다. 잠시 넘어지고 쓰러질지언정, 어떤 일에도 스러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털어놓고 나눌 수 있는 동료가 없다면 차라리 대중에게 드러내는 건 어떤가. 대신 대중은, 팬들은 이제 그들에게 여유를 선사하자. 그들로부터 위안을 받고 즐거움을 얻는다면 마땅히 되돌려줄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공평한 일이다. 이제 대중은 그들의 절실함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