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권순택]세상은 ‘640만 달러’를 잊었을까

  • 입력 2009년 6월 22일 19시 36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진 지 꼭 한 달,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사건 수사 결과가 발표된 지도 열흘이 지났다. 죽음의 여진은 계속되고 있지만 그의 자살로 사건의 법률적 처리는 일단락됐다.

노 전 대통령의 640만 달러 뇌물 수수 혐의는 피의자의 사망으로 공소권이 없어져 수사기록에만 남겨지게 됐다. 문제의 640만 달러는 노 전 대통령의 부인과 딸이 각각 박 씨에게서 받았다는 100만 달러와 40만 달러, 그리고 박 씨가 노 전 대통령의 아들과 조카사위에게 준 500만 달러를 합친 것이다. 뇌물수수 혐의에 관련된 돈은 피의자의 유죄가 확정되면 국가가 몰수 또는 추징한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처럼 피의자가 사망해 공소권이 없어지면 그것도 불가능하다.

640만 달러는 81억 원이 넘는 거액이다. 일부 친노(親盧) 인사들은 ‘생계비’ 수준이라고 비호했지만 서민 대통령을 자임한 사람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또 전직 대통령에겐 보통 국민의 생계비 이상인 월 1000만 원꼴의 종신 급여가 세금에서 지급된다. 640만 달러가 노 전 대통령의 주장대로 빌린 돈이나 사업 투자금이었다면 박 씨에게 돌려줘야 한다. 그러나 박 씨가 “사업을 잘 도와 달라는 뜻으로 줬다”고 했으니 뇌물 성격의 돈이라 박 씨가 돌려받기도 어렵다. 국고 환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격의 돈이다.

결국 640만 달러는 노 전 대통령 가족이 떠안은 ‘숙제’가 될 수밖에 없다. 노 전 대통령 가족도 이 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세간에는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이 죽으면 법률적으로 사건이 종결된다는 걸 알고 극단적 선택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640만 달러가 살아남은 가족의 몫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대통령까지 지내고 그의 죽음에 수백만 명이 조문이나 분향을 했을 정도의 인물이 그런 얄팍한 계산 때문에 목숨을 버렸을 것으로 믿고 싶지는 않다. 640만 달러에 관해서 노 전 대통령은 14줄짜리 짧은 유서에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다. 생전에 그가 가족이나 참모들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도 알려진 게 없다.

노 전 대통령 일가와 박 씨는 이제 불구대천(不俱戴天)의 관계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박 씨의 돈 때문에 남편과 아버지를 사별한 가족은 박 씨와의 모든 관계나 거래를 정리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은 640만 달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노 전 대통령의 뜻에 따라 서민적 삶을 지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식들이 아비를 죽음에 이르게 한 구차한 돈으로 마련한 미국 아파트에 들어가 편히 살 수야 없지 않겠는가. 그런 돈이 들어간 사업을 계속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국가가 몰수할 수 없게 된 그 돈을 국가나 사회에 환원하는 것은 어떨까. 환원할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 돈이 노 전 대통령이 사랑했다는 서민들을 위해 쓰인다면 그 또한 좋지 않겠나.

노 전 대통령 가족과 측근들이 경황이 없어 아직까지 640만 달러의 처리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세상이 그 돈에 관해서 모른 척해주거나 잊어주길 기다리고 있어선 안 될 것이다. 이 문제는 노 전 대통령과 가족의 명예와 도덕성과도 깊은 관계가 있는 만큼 현명하게 처리할 필요가 있다.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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