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주 오래된 노래를 자연스럽게 따라 부른 경험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10~20년간 듣지 않던 노래 가사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으면 왠지 뿌듯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상한 일도 있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 거실에서 부엌으로 왔는데, 불과 몇 초 전 거실에서 한 생각을 까맣게 잊은 황당한 경험. 이럴 땐 ‘기억력이 나빠진 것 아닌가?’ 걱정이 밀려온다. 뇌가 서서히 망가지고 있는 것 같은 불안한 느낌 말이다.
하지만 수십 년 전 노래를 완벽하게 기억하면서도 거실에서 부엌으로 간 이유를 잊는 현상은 기억력이 나빠졌다는 증거가 아니다. 이는 기억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영국 브리스톨대학교 의대 해부학과 미셸 스피어 교수가 비영리 학술 매체 더 컨버세이션에 기고한 글에서 설명했다.
스피어 교수에 따르면 우리는 기억을 하나의 능력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노래 가사를 기억하는 것은 장기 기억(long-term memory)에 의존한다. 장기 기억은 수년에 걸쳐 형성된 정보가 뇌의 여러 영역에 분산돼 저장되는 시스템이다.
측두엽의 언어 처리 영역, 청각 피질, 말하기를 담당하는 운동 영역, 감정을 담당하는 뇌 회로 등 다양한 뇌 영역이 함께 작동한다.
음악은 신경학적으로 매우 특별한 자극이다. 리듬, 언어, 움직임, 감정 등 여러 뇌 시스템을 동시에 활성화한다. 이런 복합적인 작용이 기억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노래를 수없이 반복해 듣고 따라 부를 때마다 관련 신경 연결이 강화된다. 시간이 지나면 이 신경 경로는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구조가 된다. 그래서 노래 가사는 거의 자동으로 떠오른다.
실제로 뇌 영상 연구에서는 음악 기억이 알츠하이머병 환자에서도 비교적 오래 보존되는 경우가 많다는 결과가 보고됐다.
반면 “부엌에 왜 왔지?”와 같은 기억은 ‘작업 기억(working memory)’에 의존한다. 작업 기억은 뇌의 임시 저장 공간이다.
작업 기억은 저장할 수 있는 정보량이 매우 적고, 유지 시간이 짧으며, 방해에 매우 취약하다. 작업 기억은 동시에 4~7개의 정보만 잠시 유지할 수 있는 제한된 저장 공간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단 하나의 다른 생각만 들어와도 기존 정보가 쉽게 사라질 수 있다. 이를 ‘문턱 효과(doorway effect)’ 또는 ‘문지방 효과’라고 부른다.
사람이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면 뇌는 상황 맥락을 업데이트한다. 경험을 서로 다른 에피소드로 구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안방에서 ‘거실에 있는 충전기를 찾아야지’, ‘거실에 두고 온 안경을 가져와야지’라는 생각했다면, 그 기억은 안방의 맥락과 함께 저장된다. 그런데 문지방을 넘어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가면 그 맥락 단서가 약해지면서 기억을 떠올리기 어려워질 수 있다. 그래서 거실에 서서 “내가 왜 여기 왔지?”하고 당황하게 된다.
챗GPT 생성 이미지. 이것은 기억력 저하라기보다 뇌의 정보처리 방식 때문에 빚어진 ‘착오’다.
우리의 뇌는 경험을 의미 있는 단위로 나누도록 진화했다. 이런 구조 덕분에 장기 기억은 잘 형성된다. 하지만 가끔 ‘거실이나 부엌에 왜 왔는지 잊어버리는 현상’도 겪게 된다.
작업 기억을 개선할 방법은 없을까?
오래된 노래 가사를 완벽하게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기억의 강도는 나이보다 얼마나 깊이 저장되었는가에 더 크게 좌우된다는 점이다. 핵심은 반복이다.
취향에 딱 맞아 수백 번 반복해 들은 노래 가사는 몇 초 전에 방이나 거실에서 떠올린 생각보다 신경학적으로 훨씬 강한 기억일 가능성이 높다.
나이가 들면서 정보 처리 속도가 약간 느려지고, 작업 기억은 방해에 더 취약해지며, 여러 일을 동시에 처리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하지만 어휘, 전문 지식, 반복 학습된 정보 같은 장기 지식은 유지되거나 오히려 강화되는 경우도 많다.
많은 경우 우리가 느끼는 기억력 저하 문제는 주의력 과부하에서 비롯된다. 스마트폰 알림 등 다양한 정보가 끊임없이 쏟아지는 현대 환경은 작업 기억에 큰 부담을 준다. 우리의 작업 기억은 이 정도의 방해를 견디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문제는 뇌가 정보를 저장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보를 안정적으로 저장할지 선택한다는 것이다.
몇 가지 간단한 방법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첫째, 이동하기 전에 할 일을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충전기 가지러 안방에 간다”라고 말하면 언어 네트워크가 추가로 활성화되면서 기억이 더 강하게 저장된다.
둘째, 할 일을 짧게 시각화하는 방법이다. 가져올 물건을 잠깐 머릿속에 떠올리면 막연한 의도보다 훨씬 강한 기억 흔적이 만들어진다.
셋째, 물리적 단서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부엌에 가기 전에 빈 머그잔을 들고 이동하면 행동의 목적이 구체적인 물체와 연결된다.
이런 전략들은 맥락 변화로 기억이 끊어지기 전에 의도를 강화해 작업 기억이 방해받는 것을 줄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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