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81>

  • 입력 2009년 4월 28일 13시 46분


농담 같은 진담이 있고 진담 같은 농담이 있다.

둘을 구별하지 못해 생(生)이 고달파진 이야기가 적지 않다. 구별이 힘들 땐 둘 다 진담으로 받아들여라. 진담을 농담으로 간주했다가는 큰 상처를 상대에게 주기 마련이다.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는 건…… 한 나절 놀림감에 불과하겠지만.

“농담이에요, 농담! 장난 친 것 갖고 소리는 왜 지르고 야단이세요? 어쩜, 양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네. 자 일단 타요. 비공식적인 그쪽 부탁부터 들을 게요. 내 부탁은 이야길 듣고 나서 정하죠. 그쪽이 별 따는 이야기를 하면 나도 별을 따 달라 할 거고.”

민선은 자동차가 차도로 내려서자마자 ‘자동운전’으로 설정을 변경한 다음 ‘블라인드’ 버튼을 눌렀다. 검은 기운이 차창을 감싸면서 조명이 은은하게 들어왔다. 창문 밖 풍경이 완전히 차단되었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현악 4중주였다.

“모차르트 좋아하세요? 아니면 끌까요?”

“볼륨만 약간 줄여주십시오.”

의자가 90도 회전하며 창문으로 붙고 회의용 테이블이 솟아올랐다. 자동운전의 정착은 운행시스템 뿐만 아니라 자동차 디자인에도 혁신을 가져왔다. 운전석이 정면을 향할 이유가 없었고 운전자가 정면도로를 주시할 의무도 사라졌다. 변신 로봇처럼 자동차 내부는 이용자의 편의에 따라 다양하게 바뀌었다. 때로는 침실도 되고 때로는 회의실도 되고 때로는 영화관도 가능했다. 둘이서 마주 보고 앉으니 아늑한 카페에 온 듯도 했다.

“18분 36초 남았어요.”

타임워치가 천장에 달려 있었다. 석범은 마음이 급했다.

“서사라 트레이너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하러 왔습니다.”

“사라? ……서 트레이너에게도 관심 있으세요? 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찾아가지 날 왜 괴롭히는 거예요?”

민선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변주민이라고 혹시 아십니까?”

“변주민, 변주민, 변주민, 귀에 익은 이름인데…… 누군가요?”

“특별시연합 격투대전 웰터급 준우승자입니다. 로봇 파손 및 유기죄로 앵거 클리닉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며, 며칠 전 살해당했습니다.”

“그래요? 시합을 봤었나? 그 남자가 죽었는데 서사라 트레이너는 왜 걸고 넘어져요?”

“살인사건이 발생하기 직전, 서 트레이너가 변 선수에게 거금을 줬습니다.”

“둘이 사귀었나? 아닐 텐데……. 하여튼 청춘남녀 문젠 본인들에게 물어보세요.”

“남 앨리스 형사가 서 트레이너를 이미 만났습니다. 내가 민선 씨를 찾아온 건 보강수사 차원입니다.”

민선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었다.

“서 트레이너 약점이라도 귀띔해달라는 건가요? 난 스파이 짓은 안 해요.”

“스파이 짓이 아니라 수사 협좁니다. 서사라 트레이너는 살해된 변주민 선수가 만나기로 예정된 두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앵거 클리닉 노윤상 원장과 W 선수 출신 트레이너 서사라. 지금 단서는 이 두 사람뿐입니다.”

“…… 노 원장과 서 트레이너!”

민선이 붉은 색에서 푸른 색으로 바뀐 타임워치를 올려다보았다. 10분, 벌써 절반이 지나갔다.

“서사라 트레이너는 팀에서 어떤 존잽니까?”

“글라슈트가 시합에서 보여주는 모든 동작은 사라 씨가 여러 차례 고치고 다듬은 열매입니다. 어느 것 하나 그녀 손을 거치지 않은 동작이 없죠.”

“그럼 평소엔…….”

“주먹이 앞서냐고요? 설마 사라 씨를 변주민 선수 살인용의자로 보는 건 아니겠죠?”

“이미 밝히지 않았습니까? 단서는 노 원장과 서 트레이너 뿐이라고.”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아름답다?”

“<바디 바자르>에서 최고 일당을 받던 무희였지요. 언젠가 내게 이러더라고요. W에 매혹된 까닭은 춤을 닮았기 때문이며 춤에 매혹된 까닭은 W를 닮았기 때문이라고.”

“절친한 사입니까? 하긴 글라슈트 팀에서 한솥밥을 먹었으니 정이 들기도 했겠지요.”

“그리 친하진 않아요. 사라 씨는 조용하다 못해 과묵하죠. 일 할 땐 단 한 마디도 허투루 뱉는 법이 없답니다. 나도 수다나 떨며 시간을 낭비하는 성격이 아니고.”

“호오, 친하지도 않은데 밤늦게 부엉이 빌딩 옥탑방엔 무슨 일로 간 겁니까? 거기가 서 트레이너 숙소란 걸 아는 팀원이 아무도 없었다면서요? 그날 내겐 분명 약속이 있다며 <바디 바자르>를 빠져나가지 않았습니까? 처음부터 약속 따윈 없었죠?”

민선의 두 눈에 당황하는 빛이 살짝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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