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심규선]“대한민국에 대학은 없다”

  • 입력 2007년 9월 13일 03시 02분


정책을 입안할 때 그 정책의 영향을 받는 집단의 의사를 반영하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원칙이 무시되는 정책이 있다. 대학입시제도다.

광복 직후 대학별 단독시험제로 출발한 우리나라 대입제도는 연합고사, 본고사, 국가고사, 예비고사, 학력고사, 내신, 대학수학능력시험, 종합생활기록부, 학교생활기록부 등 국가 주관 시험의 성격과 각종 평가 요소의 변화로 큰 골격이 바뀐 것만 해도 12번이나 된다.

입시제도가 아니라 대학이 문제다

하지만 입시제도가 바뀔 때마다 가장 가슴을 졸이는 수험생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새 제도를 놓고 힘겨루기를 하는 주체는 언제나 교육 당국과 대학이었다. 수험생들은 비명을 질렀지만 어른들은 무시했다. 수험생들이야 잠시 칭얼대다가도 새 제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힘없는 존재였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강요받은 룰에 맞춰 목숨 걸고 공부해서 어렵사리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은 우리나라 교육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런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 볼 기회가 있었다. 지난달 26일 본보 수습기자 및 수습사원 시험에 응시했던 대학생(일부는 졸업생)들의 논술 답안지를 통해서다. 논제는 ‘대한민국 교육에서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에 대해 논하시오.’

543명의 대학생이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심각하다고 꼽은 교육 문제는 공교육의 붕괴와 사교육의 폐해였다. 점수만 중시하는 대입제도와 평준화의 부작용, 부(富)의 편중에 따른 교육 양극화 현상을 지적한 학생도 많았다. 학벌, 간판지상주의와 3불정책 등 규제 위주의 교육 정책도 단골 메뉴였다. 그런 지적은 어느 정도 예상됐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인 것은 대학과 대학 교육에 대한 비판이 꽤 많았다는 것이다. 요즘 대학들이 ‘학교의 명운’을 걸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는 소식을 자주 접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비판은 거침이 없었다.

어느 학생은 “대한민국에 대학은 없다”고 단언했다. “깊이가 없는 수업, 연구하지 않는 학자, 오로지 입사를 위한 기계적 공부만을 하고 있는 학생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대학이 ‘고급 인재 양성소’가 아니라 ‘교양 습득소’나 ‘취업 아카데미’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다른 비판도 계속된다. “줄 세우기로 뽑은 학생들은 대학에 와서도 별반 다를 바 없는 삶을 산다. 다양한 세상을 배우고 시야를 넓혀야 할 곳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전공과목을 주입식으로 배우고 10년간 치러 온 그 시험을 또 치르며 줄서기에 참여해야 한다.” “매학기 치솟는 등록금에 비해 늘어나는 것은 학교의 건물뿐이지 교수들의 연구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대학 서열화에 대한 불만도 많았다. 어느 학생은 “우리나라 대학은 공고하게 정착된 서열 구조 속에서 호의호식해 왔다”고 비판했다. 명문대들이 좋은 학생을 뽑는 데만 열을 올렸지 정작 입학하면 제대로 가르치지는 않는다는 불만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명문대의 ‘브랜드 파워’를 객관적, 지속적으로 검증해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불량 대학’의 오명, 어떻게 씻어 낼지

요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영어로 하는 강의에 대한 문제점을 알게 된 것은 덤이었다. “교수도 학생도 영어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이다 보니 정작 중요한 학습의 질은 떨어지고 있다. 겉만 번듯하고 내실은 없는 속빈 강정만 키워 내는 셈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해결책은 어떤 것일까. 과감한 정원 축소와 경쟁력 없는 대학의 통폐합, 선택과 집중을 통한 특성 학문 육성, 자율화를 통한 대학 간 경쟁 유도, 실적 위주의 엄격한 교수 평가와 대우, 입학보다 졸업을 어렵게 하는 학사관리 등을 제안했다.

“불량 대학생을 양산하는 대학 교육이 대한민국 교육의 열쇠를 쥐고 있다. 어중이떠중이 불량 대학과 그들이 양산한 불량 지식인으로는 불량 국가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대학에서 4년간 공부한 대학생의 진단이다. 대학의 반론이 궁금하다.

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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