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기술전쟁에서 법률전쟁으로]<4·끝>손놓고 있는 정부-기업

입력 2005-12-16 03:02수정 2009-10-08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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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경북 구미시의 중소기업 A전자 K 사장은 해외에서 특허권 침해로 수천억 원 규모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장을 받고 눈앞이 캄캄했다. 1심에서 패소한 뒤 다급해진 K 사장은 산업자원부와 외교통상부 법무부 등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별 도리가 없다”는 답변만 받았다. K 사장은 같은 업계 회사를 찾아다니며 함께 대응하자고 호소했지만 싸늘한 반응뿐이었다.

K 사장은 수십억 원을 주고 결국 미국 대형 로펌에 사건을 맡겨 지난해 8월 2심에서 손해배상액을 30억 원 수준으로 크게 낮춰 다국적기업인 상대방과 합의했다.

그는 “처음 소송을 당했을 때 정부 업계 어느 곳에서도 도와주기는커녕 이야기조차 들어주지 않았다”며 “이제 와서 소송에서 좋은 결과를 얻은 비결을 알려 달라는 정부와 업계가 야속하기만 하다”고 털어놨다.

▽빈약한 정부 법률 지원=‘메이드인 코리아’를 향한 법률 공세는 무차별적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한국 정부는 대책 마련은커녕 실태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현재 정부가 기업들에 제공하는 법률 지원으로는 중소기업진흥공단이 법무부 ‘수출법률자문단’ 소속 변호사를 통해 제공하는 법률자문서비스가 거의 유일하다. 진흥공단에서 건당 200만 원의 자문료를 지원해 주고 기업은 1년에 2차례 400만 원 한도에서 법률자문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한도를 초과하는 자문료는 기업이 부담해야 한다.

예산이 적다 보니 법률자문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기업은 한 해 100∼120개 업체로 제한된다. 자문서비스도 무역 및 투자 관련 국제계약서 검토나 국제 거래 관련 법률을 상담하는 정도에 그친다.

해외 진출 중소기업들은 현지 법률 분쟁에 휘말렸을 때 KOTRA 해외무역관이나 현지 대사관에 자문한다. 하지만 KOTRA에는 지원해 줄 예산이나 제도가 아예 없다.

▽부랴부랴 대응나선 정부와 업계=국내 중소기업을 겨냥한 해외 특허 공세는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됐지만 정부는 이에 대비한 태스크포스를 지난해 말 부랴부랴 만들었다.

산자부는 올해부터 비영리기관인 한국전자산업협회에 특허지원센터를 설립해 중소 정보기술(IT) 업체를 대상으로 특허 분쟁 대응 요령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산자부 관계자는 “소송 진행 단계에서의 적극적인 지원은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상 보조금 지원으로 비칠 수 있어 비영리기관을 통한 간접 지원을 택했다”고 전했다.

정보통신부도 차세대 IT 전략인 ‘IT839’ 분야에 대한 지적재산권 문제 지원을 위해 올해 8월부터 산하기관인 정보통신진흥원에 지적재산권 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다.

자문 변호사나 한국전자산업진흥회 특허지원센터 정재관 팀장은 “한국 주력품인 전자·정보통신·반도체 업종을 상대로 한 특허 분쟁이 점차 화학·바이오 등 신산업 부문으로 확대되는 추세”라고 전했다. 분쟁이 일어나는 산업의 범위도 커지면서 지적재산권 전담부서를 신설하거나 법무팀을 강화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구대환(丘大煥) 서울대 법대 교수는 “국제 산업 기술 전쟁은 과학자와 기술자들의 힘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며 “정부는 물론 법조인과 경영인도 과학기술과 산업, 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함께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또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에 급급한 현 지원책에서 더욱 장기적인 대응 전략을 짜야할 때라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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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성공한 CEO 뒤엔 유능한 CLO 있다

대부분의 미국 기업에는 법률 분쟁을 사전에 예방하고 사후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해 최고법률책임자(CLO·Chief Legal Officer)의 역할이 강조된다. 장수한 글로벌 기업의 최고경영자(CEO·Chief Executive Officer) 곁에는 단짝 CLO가 있다.

제너럴일렉트릭(GE)의 잭 웰치 전 회장은 CEO 자리에 오르자마자 그룹 내 법무부서부터 개편했다. 그는 수도 워싱턴에서 연방대법원 사건을 전담하던 헌법전문 변호사 벤 하이네만 씨를 CLO로 영입했다.

GE에서 웰치 회장의 총애를 받던 전문경영인 래리 보시디 씨는 얼라이드시그널(Allied Signal, 현 GE 자회사)의 CEO 자리로 옮긴 후 세계 최대의 항공기용 조종계기 제조업체인 하니웰과의 합병을 성공적으로 성사시켰다. 이 과정에서 기업합병 전문변호사인 피터 크레인들러 변호사가 보시디 씨의 측근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IBM 부활의 신화를 썼던 루 거스너 회장 곁에는 법률자문뿐만 아니라 그룹 전반의 재무에 대해서도 충언을 아끼지 않았던 CLO 래리 리시아디 변호사가 있었다.

한국에서도 이미 삼성 LG SK 등 대기업들이 명망 있는 변호사를 대거 영입해 CLO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과거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수준에 그쳤던 기업 법무 기능을 강화해 기업 의사결정 과정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법률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야 한다는 CEO들의 인식 변화 때문이다.

CEO 전문 헤드헌팅업체 관계자는 “최근 판검사 출신의 변호사 영입을 문의해 오는 기업이 늘고 있다”며 “해외 기업과의 법률 분쟁은 물론 외국인투자가들의 기업경영에 대한 입김이 세져 사내 법무 기능을 강화하는 추세”라고 전했다.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美로펌 한국기업 담당변호사 기고

미국 로펌에서 한국 기업의 법률분쟁 사건을 다루면서 안타까움을 많이 느낀다.

한국 기업들은 미국에서 법률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한국의 로펌이나 잘 아는 한국 변호사에게 연락하는 것 같다. 이런 과정을 통해 미국 로펌에 간접적으로 사건을 의뢰한다.

문제는 한국 로펌이나 한국 변호사의 역할이 단순히 소개를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부 한국 로펌이나 변호사는 상당한 규모의 소개비를 받는데, 미국에서는 다른 로펌이나 변호사를 소개할 때 소개비를 받는 것은 불법이다.

또 사건의 상당수가 한국 로펌과 미국 로펌을 통해 릴레이식으로 이뤄지는 것도 문제다. 이런 형태로 법률 서비스를 받으면 변호사 비용을 한국 로펌과 미국 로펌에 이중으로 내게 된다. 또 한국 로펌이 전달 과정에서 의미를 잘못 전하거나 혹은 의견을 덧붙이게 되면 한 사건에 대해 두 개의 로펌이 일을 하는 비효율적인 법률 서비스가 이뤄지는 셈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기업 내에서 법률 서비스에 대한 정확성과 합리적인 가격을 감시할 수 있는 전문가(사내 변호사·General Counsel)를 두는 게 필요하다. 제대로 훈련된 사내 변호사 한 명을 보유하는 것이 기업의 법률분쟁 예방과 대응에 드는 비용을 절감하는 지름길이다.

미국 로펌의 변호사들은 한국 기업들을 가리켜 ‘좋은 고객(nice client)’이라고 한다. 변호사 비용을 달라는 대로 다 주기 때문이다.

로펌이 저렴한 비용으로 질 높은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고객과의 사이에 항상 긴장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기업에서 이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한국 정부의 중소기업에 대한 법률 지원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형식적인 법률자문단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국제 법률시장에 관한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전문가들로 자문단을 구성해 중소기업이 좋은 법률 서비스를 제공받도록 하고 그 서비스를 제대로 감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최현석 변호사·미국 뉴저지 주 ‘웡·플레밍 로펌’ (Wong·Fle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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