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9년 김영삼 신민당 총재 의원직 제명

  • 입력 2005년 10월 4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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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4일 오후 4시 7분. 집권당인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 159명은 수백 명의 무술경관이 호위하는 가운데 야당 의원들이 점거 중이던 국회 본회의장 대신 의원총회장으로 사용되던 146호실로 모여들었다. 이어 비공개 회의에서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金泳三) 의원 제명안 표결이 강행됐고, 백두진(白斗鎭) 국회의장은 오후 4시 20분 “출석의원 159명 중 159표로 가결됐다”고 발표했다.

YS는 즉각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폭거를 맹비난했다.

“나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살 길을 선택할 것이다. 정치는 영원하지만 정권은 유한한 것이다. 공화당 정권이 아무리 힘의 정치를 강화한다 하더라도 떠나버린 민심을 되돌릴 수는 없다.”

의정사상 최초인 YS에 대한 의원직 제명은 박정희 정권에 잠시 기쁨을 줬지만 부마(釜馬)항쟁을 불러온 데 이어 불과 22일 뒤 10·26사태로 정권이 몰락하는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의원직 제명은 그해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역전승으로 총재에 선출된 YS가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민주주의의 새벽은 오고 있다”며 강경투쟁을 선언할 때부터 마치 예고돼 있던 일처럼 진행됐다. 8월 들어 YH 여공 신민당사 농성사건과 신민당 총재단 직무정지 가처분신청으로 경색됐던 정국은 9월 16일자 미국 뉴욕타임스에 YS의 인터뷰가 보도되면서 가파른 국면으로 치달았다.

“내가 미국 관리들에게 미국은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서만 박 대통령을 제어할 수 있다고 말할 때마다 그들은 한국의 국내정치에 관여할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억지 이론이다. 미국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3만 명의 지상군을 파견하고 있는데 그것은 국내 문제에 대한 관여가 아니란 말인가.”

이 발언에 분노한 박 대통령은 집권당 지도부에 YS 제명을 지시했고 이 지시는 일사천리로 집행됐다. YS는 제명 뒷얘기를 자서전인 ‘김영삼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제명 전날 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요청으로 그를 만났을 때) 김재규는 나에 대한 박정희의 감정이 극에 달해 있다면서 박정희가 제명 구속은 물론 나를 죽이려들 것이라고 했다. 나는 ‘나보다 박정희가 먼저 죽을 거요. 김 부장도 조심하시오’라고 말해 주었다. 그 후 박정희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김재규도 다시 볼 일이 없게 됐다.”

김동철 정치전문기자 eastpah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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