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최영묵]국정원을 위한 변명

  • 입력 2005년 9월 20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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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국가정보원에 있던 절친한 친구가 찾아와 하소연을 했다.

국정원을 개혁한답시고 요직을 모두 특정 지역 출신으로 채우고 있다는 얘기였다. “얼마 전까지 대통령 아들이 날뛰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는데, 또다시 비슷한 일이 벌어지니 최고 국가정보기관이 이래서야 되겠느냐”고 흥분했다.

국가안전기획부가 부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날 무렵 공채로 들어가 국비로 외국에서 학위까지 받아 왔으니 ‘맹탕’은 아니었고, 국가관도 남다른 친구였다. 그런데도 두 정권에 걸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니 남은 건 조직에 대한 실망뿐인 듯했다.

정권 초기의 일이라 그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은 서서히 진실로 드러났다. 검찰 경찰 등 권력기관은 물론 일반 행정부처 요직까지 특정 인맥으로 채워졌고 결국 그것이 정권에 부메랑이 됐다.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이른바 ‘X파일’ 사건도 그 시절 잘못된 개혁이 빚어 낸 후유증 가운데 하나다. 또다시 국정원 개혁이 화두가 된 요즘 이 친구의 고민은 그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또 우리만 희생양을 만드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국정원의 불법 행위를 비호하자는 뜻이 아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씻을 수 없는 악행을 잊어버리자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정보기관의 기능 자체를 위축시키거나, 어려운 여건에서도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많은 직원까지 어린 자녀들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15일 국회에서는 정보위원회가 주최한 공청회가 처음 열려 백가쟁명식 아이디어들이 쏟아졌다. ‘국내정보 분야 폐지’ ‘국회의 통제 강화’ 등 국정원에 대한 견제와 감시에 초점이 맞춰졌다.

국정원의 개혁은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러나 그 첫 단추를 끼우는 이날 공청회를 보면서 뭔가 개운찮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또다시 ‘정치권에 의한, 정치권을 위한 개혁’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많은 국정원 직원은 이날 공청회에 대해 “일방적으로 국정원에 불리한 주장만 나왔다”는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국정원을 상대로 도청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 간부의 며칠 전 브리핑 내용은 시사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권부가 무너지는 것을 고소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국정원이 이렇게 무너지는 것은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이다. 국정원처럼 국내의 기술유출을 막고 외국의 정보를 많이 수집하는 기관이 어디 있느냐. 외국 대사관에도 국정원 직원들이 나가 있는데 이렇게 모든 것이 까발려지면 해외 정보기관들이 국정원을 상대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국정원 기능 전체가 10이라면 문제가 되는 건 0.5 정도다.”

상대 권력기관에 대한 이런 평가는 예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환부는 도려내고 잘못된 것은 고치되 또다시 권력이나 ‘제3자’만의 논리에 의해 국정원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국익과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공청회에서 나온 한 의원의 제안은 참고할 만하다.

“국회에서 뚝딱 해치우는 식으로 하지 말고, 국방개혁처럼 정보개혁법안을 만들어 기준과 시스템, 절차에 따라 하자.”

최영묵 사회부장 ymoo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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