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서령]한가위 소원 ‘부자되기’ 말고는 없나

  • 입력 2005년 9월 1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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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는 다리를 저는 경비 아저씨가 있었다.

수염이 시커먼 고등학생들도 그 앞에선 쩔쩔맸다. 첫 한두 해는 그가 싫었다. 경비실 톱밥난로가 따뜻해 겨울에는 전화기를 그리로 돌려놓고 거기서 일직을 했다. 그 지겨운 일요일이 이제 와 그리워질 수 있다는 건 확실히 세월의 힘이겠지만 어쨌든 그런 어느 날 그에게 막걸리 한 되를 사주면서 우리는 친해졌다. 난로 위 냄비에다 두부와 돼지고기와 김치를 같이 넣고 끓일 때 돼지고기를 내가 사면 아저씨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아유, 김 선생 구우리 알그튼(구렁이 알 같은) 돈!” ‘구우리’ 할 때의 그 둥글게 내밀던 입 모양이 아저씨의 소박한 영혼을 슬쩍 보여 줬다. 돈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고 남에게 돈 한 푼을 쓰게 하는 것이 얼마나 몸 둘 바 모르게 고맙고 미안한 일인지를 그 아저씨는 ‘구우리 알’이란 말속에 모조리 녹여 놓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둥 고맙다는 둥 하는 말은 아저씨의 언어가 아니었다. ‘구우리 알’이란 말만으로 충분히 의사전달이 가능한 간결한 언어를 그 무렵 나는 흥미 있게 지켜봤다.

아이들 어릴 때 추석이면 늘 달에 절을 했다. 공짜로 절만 하는 법은 없었다. 소원을 빌어 절값을 챙겼다. “각자 맘속으로 소원을 빌렴” 하면 일곱 살, 네 살짜리 아이들은 뭔가 오랫동안 하염없이 중얼거렸다. 뭘 빌었어? 확인해 보는 것이 나의 큰 즐거움이었다. “행복하게 해 달라고 빌었어요” 식의 추상에서부터 “잃어버린 왕관 머리띠 찾게 해 달라고 빌었어요” 식의 실속까지, 아이들의 소원은 차고 넘쳤다. 세 개만 빌어야 들어주셔. 다섯 개를 빌면 달님이 욕심 많다고 안 들어줘, 하나가 다른 하나를 흔들어 절제를 깨우쳐야 기원이 멈춰졌다. 기도하면서 움직이던 아이들의 열중한 입 모양에 나는 늘 코끝이 찡했다.

중국에서 60년을 살다 최근 귀화한 한 할머니를 만났다. 한국의 인상이 어떠냐 물어 봤더니, “사람들이 서로를 너무 ‘사용주의’로 대해요” 한다. 필요하면 가까워지고 아니면 밀어버리는 데 거리낌이 없어 보인단다. 전에 우리가 일본 사람을 흉보면서 하던 말과 비슷한 것도 같다. 여남은 명이 모인 자리에서 각자 소원을 말하자고 해 봤다. 하나같이 ‘부자 되기’라고 한다. 건강과 사랑은 자기가 노력하면 얻을 수 있지만 돈은 운이 따라야 하니 소원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는 해설이었다. ‘부∼자 되세요’가 거부감 없는 덕담으로 통용된 지 오래됐다. 돈에 대한 기만적 태도를 없앤 말이라고 쳐도 ‘부자 되기’가 한 사회 전체의 꿈일 수는 없다. 처음 ‘부∼자 되세요’에 민망함과 거부감을 느꼈던 이들도 반복되는 중에 절로 익숙해졌다. 물론 나 또한 ‘부자 되기’가 싫을 리는 없다. 그러나 다른 꿈을 꾸는 사람도 만나고 싶다. 소원을 말하면 얼른 로또로 대표되는 일확천금을 떠올리고, 불안을 말하면 얼른 실직과 가난만을 연상하는 세상은 천박하다. 부자되기만을 꿈꿔서는 남을 ‘사용주의’로 대할 우려가 있다. 올 추석 서울에선 구름이 달을 가릴 거라 한다. 부자 되게 해 달라는 일사불란한 기원에 달이 지겨워졌나. 하긴 구름 속에 숨은 달에도 소원이야 빌 수 있다. 올 한가위엔 부자 되기 아닌 소원을 빌자.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돈에다만 목을 맸나. ‘구우리 알 같은 돈’은 말 그대로 쉽게 손에 넣을 수가 없다. 남의 돈을 ‘구우리 알같이’ 여기고 경비 아저씨처럼 작은 돈에 감격할 줄 알면 족할 것을. 소유가 존재를 규정하는 세상에선 암만 부자가 돼도 돌아서면 다시 빈곤감에 시달릴지 모른다.

추석이다. 달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의 메타포다. 조상이고 우주이고 신이다. 밤, 대추를 따고 해콩으로 송편을 빚어 달에게 우주에게 조상에게 절 올릴 때 우리가 빌어야 할 소원은 뭘까. 돈? 귀성에 10시간이 걸려도 “별로 안 막혔어”라고 환하게 웃을 줄 아는 피가 우리 팔뚝 안을 향기롭게 흐르고 있는데?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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