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별아]갑부할머니의 쓸쓸한 자살

  • 입력 2005년 8월 12일 03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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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나는 아직도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말을 믿는다. 지금은 까마득한 신화나 전설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소박하고 누추하게도 그 말을 믿는다.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돈이 없다고 꼭 불행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나의 믿음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진부하고 너절하게 취급되는지, 우연히 접한 미국의 구인광고 문구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돈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이보다 더 노골적일 수가 없다. 세계 최고 부국을 일군 물신(物神)의 적자(嫡子)들이 나를 향해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한다. 돈이 충분하다면 어떤 불행이든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돈이 없으면 불행하다. 가난은 불편을 넘어서 삶의 장애가 된다. 그럼에도 충분히 돈을 갖지 못한 자들은 필요만큼 주어지지 않은 부족분을 기껏해야 행복 운운하는 넋두리로 채우려는 것뿐이다. 그야말로 패배자의 시기요 강짜요 질투에 불과하다. 돈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그 역시 쓸데없이 놀리던 입을 꾹 다물 것이다. 입 닥치고 묵묵히 행복하기에 전력을 다할 것이다. 오오, 이토록 비싸고 값진 행복!

지난 유월, 70대 할머니가 한강에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할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은 매년 급증하여 하루 평균 7명꼴로 발생하는 노인 자살과 달랐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노인 자살은 신병이나 처지를 비관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병고, 가난, 고독, 소외감 등이 삶의 벼랑에서 노인들의 등을 떠미는 것이다. 하지만 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할머니는 60억 원대의 재산가였다. 과연 얼마만큼의 돈이 있어야 행복을 살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로지 스스로 일한 대가로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눈에 할머니는 ‘충분히 행복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이 비로소 삶의 비밀과 진실을 밝혔다. 속속 드러난 죽음의 이면에는 고급아파트에 살며 남 보기에 번듯한 자식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누구도 대신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빠진 외로운 노인이 있었다. 새로운 ‘행복’을 ‘구매’하여 집을 떠난 남편, 엄마의 주머니 속에 든 ‘행복’이 탐나 서로 싸우고 보채며 시시때때로 이간질했다고 알려진 자식들…. 그리하여 할머니는 충분히 행복할 만한 자금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마음의 가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가난이 앞문으로 들어오니 사랑이 뒷문으로 빠져나가더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발버둥질해 봐도 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남녀 간의 사랑에도, 가족 간의 사랑에도 마찬가지로 통용된다. 슬프게도, 한국 사회의 많은 노인 자살자는 ‘자식들에게 짐이 되기 싫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들은 노후대책을 설계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세대다. 늙어가는 부모의 가벼운 주머니는 고스란히 자식들의 부담이 된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부모의 주머니에 든 것을 제 것인 양 여기는 자식들에게는 성숙한 인간으로 독립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성숙한 인간이라면 제 몫인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행복을 사든, 찾든 온전히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구해야 한다. 그런데 부모의 부가 고스란히 자식에게 세습되고 노인의 복지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제대로 성숙해질 수 없다. 가난한 부모는 ‘짐’이 되고 부자 부모는 ‘봉’이 된다. 가족의 화목은 물론 가족 구성원 개개인의 의지와 노력으로부터 비롯된다. 하지만 가족이 말 그대로 ‘뜻이 맞고 정다울’ 수 있으려면, 잔인한 비유이긴 하지만 누군가가 숙주가 되고 누군가는 그에 기생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 방에 ‘행복’을 살 수 있다는 복권이 내세운 광고 문구는 ‘인생역전’이었다. 하지만 실로 그곳에는 ‘인생’은 없고 ‘돈’만 있다. 진정한 인생의 역전 혹은 반전에 대한 고민보다는 ‘돈으로 행복과 불행이 갈라지는’ 진짜 불행이 있다. 정말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단 말인가.

가난한 이도, 부자도 없는 그곳으로 떠나가신 할머니의 명복을 빈다.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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