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속의 오늘]1947년 IOC의 KOC 공식승인

  • 입력 2005년 6월 20일 02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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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향한 한민족의 염원을 담았던 단어. 그러나 광복과 함께 시작된 냉전 시대엔 남북 체제경쟁의 그림자가 ‘Korea’에도 짙게 드리워졌다.

1947년 6월 2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제40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는 대한올림픽위원회(KOC·당시엔 조선올림픽위원회)의 IOC 가입을 정식 승인했다.

이때 IOC가 인준한 KOC의 정관은 ‘KOC가 올림픽 운동을 펼치는 영역은 한반도 전역이며 그 사무실 소재는 서울’이라고 명시했다. 다분히 북한을 겨냥한 포석.

6·25전쟁 중이던 1952년 7월 19일 개막된 제15회 헬싱키 올림픽. 국민성금으로 참가 경비를 마련한 43명의 한국 선수단은 태극 마크와 ‘Korea’ 표기를 가슴에 달고 뛰었다.

북한도 선수단을 파견했지만 경기장 밖에서 시위만 벌여야 했다. ‘북한 선수는 한반도의 유일한 올림픽위원회인 KOC의 선수단 명단에 등재돼 있지 않아 뛸 수 없다’는 IOC의 결정 때문.

IOC가 남북한의 첨예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꾸준히 내놓은 카드가 ‘단일팀 구성’. IOC의 권유로 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해 1963년 스위스 로잔에서 남과 북이 마주 앉았다.

“단일팀 국기는 태극기여야 합니다.”(남)

“앞면은 태극기, 뒷면은 인공기로 합시다.”(북)

“오륜 표지 밑에 ‘Korea’라고 쓰고 양쪽 귀퉁이에 태극기와 인공기를 그리는 것은 어떤가요.”(IOC 중재안)

이런 실랑이는 26년 뒤인 1989년 아시아경기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회담에서도 재연됐다.

“단일팀 명칭을 영문은 Korea, 한글은 남북단일팀으로 합시다.”(남)

“그러지 말고 영문은 Koryo, 국문은 ‘고려’로 합시다.”(북)

이 지루한 논쟁이 마침표를 찍은 것은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의 남북단일팀이 구성된 1991년.

‘영문은 Korea, 국문은 코리아, 단기는 흰색 바탕에 하늘색 한반도기, 단가는 아리랑.’ 남북한 선수들이 ‘Korea’ 국호와 한반도기 아래 함께 서는 데 걸린 세월은 반세기. 한민족이 ‘통일 Korea’ 하늘 아래 함께 사는 날은 언제쯤일까.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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