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황호택]‘희선 이야기’

  • 입력 2005년 6월 10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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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선 씨는 독립운동가의 후예라는 간판으로 2선 국회의원에 국회 정무위원장이 됐다. 국회의원 28명이 참여하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 회장이기도 하다. ‘일제(日帝)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특별법’이 제정되기까지 김 의원의 역할이 컸다. 그가 가계(家系) 검증을 달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들이다.

김 의원은 각종 인물정보와 홍보물의 경력란에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의 손녀’라고 적었다. 그러나 친손녀인지, 종손녀(從孫女)인지 분명하게 명기하지 않고 ‘손녀’라고 얼버무려 놓고 있다. 독립유공자 유족 보상금은 직계자손에게만 준다. 김 장군의 유족도 아닌 김 의원이 국회에서 독립운동가 유족 대표처럼 행세하는 데 대해 독립운동가 유족들은 흔쾌한 기분이 아닐 것이다.

김 의원은 김 장군의 친손녀가 아닐뿐더러, 한 월간지의 보도와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종손녀도 아니다. 두 사람은 본관이 다르다. 김 의원(의성 김씨)의 증조모가 안동 김씨 집안으로 개가(改嫁)해 얻은 아들이 김 장군이라는 것이다. 김 장군의 핏줄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친척들의 입을 통해 김 의원 부친의 친일(親日) 행적 논란이 불거져 나왔다. 월간조선은 김 의원 부친이 일제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 유하(柳河)경찰서에서 독립군을 잡는 특무(特務)였다고 현지 취재를 거쳐 보도했다.

김 의원은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친일 후예들의 공격이 가혹하다”고 억울함을 호소한다.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려는 언론 활동을 ‘친일 후예의 공격’이라고 매도한 것이다. 진실이 다 밝혀지고 나면 ‘친일 후예’라는 화살은 김 의원에게 부메랑으로 날아가 꽂힐 것이다.

단죄 받아야 할 친일파는 대부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 후손에게 조상의 죄업을 연좌제 방식으로 물어서는 안 된다. 김 의원 가계에 대한 언론의 추적 보도는 연좌제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과연 김 의원이 독립운동가의 유족을 대표하는 활동을 할 수 있느냐를 따지는 것이다. 친일파 조상을 독립운동가로 신분 세탁해 입신양명(立身揚名)하려는 정치인이야말로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일순위로 배격해야 할 대상이다.

김 의원은 홈페이지의 자전(自傳)에세이 ‘희선 이야기’에서 불행했던 가족사를 털어놓는다. ‘아버지는 광복 후 중국으로 떠난 뒤에 행방불명되고 열 살 때 어머니가 개가했다. 친척집을 전전하며 성장했다. 어렵게 입학한 여상(女商)도 졸업하지 못했다. 그러나 꾸준히 독서하며 자기계발을 했다. YWCA와 크리스챤아카데미 활동에 참여하며 여권(女權)과 민주화 운동에 눈떴다.’

‘희선 이야기’에서 김 의원은 아버지를 독립운동가로 묘사한다. 어린 시절 외로운 소녀는 김 장군과의 관계와 아버지의 행적에 대해 사실과 다른 환상을 품었을 수도 있다. 소련에서 온 아버지의 편지가 상상력에 불을 댕겼을지도 모르겠다. 그 환상은 소녀에게 불행을 극복하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환상이 깨졌는데도 거기에 계속 집착하는 것은 자신과 국민을 속이는 일이다.

김 의원은 친일 청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다 스스로 그 덫에 걸렸다. 그는 독립운동가의 후예인지, 일제 특무의 후예인지 스스로 답할 때가 됐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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