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우익의 우쪽, 좌익의 좌쪽

  • 입력 2005년 4월 13일 18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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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방문을 전후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장차 어떻게 구체화될지 모르지만 일단 듣기에는 신선하다. 일본 문제에 대한 발언도 그렇고 북한 문제에 대한 발언도 그렇다. 특히 베를린의 동포간담회에선 “때로는 남북관계에서도 쓴소리를 하고 얼굴을 붉힐 때는 붉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나는 대한민국에 좌파 정권이 들어선 것을 극우 보수주의자들처럼 종말론적인 심정으로 보진 않는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좌파 정권이 들어서는 것은 정권교체의 예외 아닌 상례다. 성공적인 경제발전으로 거대한 산업노동자를 안게 된 한국사회에서 근로자의 권익을 대변할 정당이 등장했다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다.

물론 오늘의 한국정치에는 문제들도 있다. 가령 좌파 정권이 스스로 좌파가 아니라고 도회(韜晦)하는 경우다. 국가정보원에서 북한 노동당 중앙위의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확인하고 사법적으로도 아직 간첩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피의자를 친정부 신문에서 칼럼 필자로 초빙하는 정권, 6·25 동족전쟁을 도발한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운동을 이제 와서 새삼 ‘독립운동’으로 치켜세우는 인사를 정부 추진사업의 위원장으로 임명한 정권, 그러한 정권을 좌파 정권이 아니라고 강변한대서 믿을 국민이 있을까.

▼‘과거’의 행적보다 ‘그후’가 중요▼

긴 역사에서는 일회적인 ‘과거’의 행적이 아니라 ‘그 후’가 중요하고 ‘현재’가 더욱 중요하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에서 개최된 국제사회주의자대회에는 레닌과 트로츠키, 아우구스트 베벨과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온 베니토 무솔리니가 참석했다. 그렇대서 그 후 20세기 파쇼의 원조가 된 무솔리니를 사회주의 운동가로 평가하는 사람이 있을까.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다같이 항일 독립운동을 했던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에선 서방 자본주의 국가와 함께 소련도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동맹국으로 싸웠다. 모든 면에서 열세에 있던 소련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이긴 데에는 히틀러 전쟁을 계급 이념을 초월한 ‘조국전쟁’이라 호소하고 소련 국력을 총동원한 스탈린의 업적이 절대(絶大)했다. 나는 6·25 전쟁 전에 이태준(李泰俊)이 쓴 ‘소련기행’에서 먹을 것이 없어 혁대를 물에 불려 짓씹으며 몇 주나 시가전을 버텨 싸운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의 처절한 얘기를 감명 깊게 읽은 일이 있다.

그러나 전후 서방세계는 물론 1956년 이후 소련에서조차 2차 대전 당시의 업적 때문에 독재자 스탈린을 평가해 주자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1951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이 결성되었을 때 거기 참여한 서유럽의 사회(민주)당, 노동당의 왼쪽에는 같이 하늘을 일 수 없는 동유럽의 공산당이 있었다. 그것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원리를 받아들인 서유럽 좌파의 이념적 경계선이었다. 좌우파 정권이 번갈아 들어서면서도 서방세계가 끝내 냉전시대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지반이 거기 있었다.

세기가 바뀌면서 한국에도 마침내 좌파 정권이 등장했다. 이 좌파 정권의 좌 쪽에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래서 ‘얼굴을 붉히고’ 쓴소리를 해야 할 어떤 상대도 없다면 나도 우익 보수주의자들처럼 종말론적인 심정에 빠지게 될 것이다.

▼서유럽 안정은 좌우 상생 결과▼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보수 우파의 우 쪽에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얼굴을 붉히고 쓴소리를 해야 할 어떤 상대도 없다면 나는 그러한 보수 우파의 집권도 종말론적인 심정으로 맞이할 것이다. 국토에서 국군을 시켜 국민을 대량 살육하여 집권한 뒤엔 청와대의 권좌를 물러날 때마다 몇천억 원의 검은 돈을 챙기고 나오는 신군부와 그 추종세력도 우파의 저쪽이 아니라 이쪽으로 받아들이는 보수 세력이라면, 그것은 북의 세습독재체제를 좌파의 저쪽 아닌 이쪽으로 간주하는 이른바 ‘진보’ 세력과 마찬가지로 나라와 겨레의 앞날에 파국을 가져올 불온 불길한 세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서유럽의 안정과 번영은 파시즘에 대해서 싸운 우파와 공산주의에 대해서 싸운 좌파가 상생하면서 일구어 온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번 여행에서 그것을 보고 올 줄 믿는다.

최정호 객원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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