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보통국가와 보편국가

  • 입력 2005년 3월 25일 18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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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이 그래서 그런지 요즘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왜 동아일보를 설립한 1920년의 ‘젊은 그들’은 신문 제호를 한국도 아니고, 조선도 아니고, 서울이나 경성도 아닌 ‘東亞’라고 지었을까? 민족자결주의의 분위기 아래 ‘조선 민족의 표현 기관임을 자부’하는 신문을 만들고자 했던 만큼, 의당 한국 또는 대한(大韓)이나 조선이라는 이름에 끌렸을 법한데도 설립자들은 ‘東亞’를 택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대한제국 말 황성신문 사장으로 명성을 날리던 유근(柳瑾) 선생은 ‘東亞日報’라는 제호를 내놓으면서 “우리나라가 앞으로 발전하려면 시야를 크게 잡고 동아시아 전체를 무대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새삼 그들의 선각(先覺)에 숙연해진다.

사실 지금처럼 한반도의 운명을 동아시아의 지평 속에서 이해하고 개척하려는 논의가 무성한 적도 없었던 같다. 이제 때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노무현 대통령이 특히 중국과 일본을 겨냥해 ‘동북아의 균형자’ 얘기를 꺼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의 제임스 호지 편집장은 지난해 ‘아시아의 부상’이라는 글에서 “지난 수세기 동안 중국과 일본이 지금처럼 ‘같은 시기’에 강성했던 적이 없다”고 갈파한 적이 있다. 400년 전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 이후를 말한 듯하다. 요컨대 어느 한쪽이 강성한 적은 있었지만, 두 나라가 동시에 슈퍼파워였던 시대는 없다는 역사적 직관이다. 충돌이 불가피할지 모른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더구나 두 나라를 뒤덮고 있는 국가적 정조(情調)는 민족주의다. 중국은 경제성장에 따른 인민의 민주화 욕구를 억제하기 위해 중화민족주의를 부추기고 있고, 일본은 ‘보통국가화’라는 기치 아래 민족주의의 가장 편협한 변종인 쇼비니즘의 속도에 박차를 가한 지 이미 오래다.

노 대통령의 흉중에 어떤 설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가 얼마 전 독립기념관에서 “지금의 국제 정세가 대한제국 말 개화기와 비슷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는 것을 보면 혹시 그 당시 유길준이 제기한 ‘영세중립국론’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 좋다. 국가의 10년 대계, 100년 대계를 논하는 데 백가쟁명(百家爭鳴)인들 마다할 게 있겠는가. 다만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우리가 중국보다 잘난 점은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일본보다 잘난 점은 보편적 가치를 유린한 역사를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류가 확립해 온 보편적 가치는 수많은 유엔 인권보고서 중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유엔 인권위원회의 ‘맥두걸 보고서’는 일제하 일본군위안부를 노예제(slavery), 위안소를 강간센터(rape center)라고 규정했다. 일본이 유엔의 문명 교육을 거부하는 한 일본이 아무리 ‘보통국가’를 꿈꿔도 우리보다 비교우위를 가질 수는 없다.

우리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다. 피해자였기에 우리는 ‘보통국가’가 아니라 ‘보편국가’의 대열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 점을 잊지 말자.

김창혁 국제부 차장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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