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75년 淸 광서제 즉위

  • 입력 2005년 1월 11일 18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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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요즘 아시아에서 가장 각광받는 지도자 중 한 명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콤플렉스는 있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 그는 얼마 전 청나라 말 서태후(西太后)가 광서제(光緖帝) 배후에서 실권을 휘두르는 내용의 중국 TV 드라마를 압력을 넣어 조기 종영시켰다. 자신이 광서제와 비교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후 주석이 그토록 닮고 싶지 않았던 광서제. 그는 1875년 1월 12일 동치제(同治帝)의 뒤를 이어 청나라 11대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동치제의 외사촌으로 혈통상 황제의 자격이 없었으나 동치제의 어머니였던 서태후의 강력한 후원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그의 나이 네 살.

광서제는 천자(天子)를 시켜준 것에 대한 보은으로 서태후에게 실권을 내주고 33년 즉위 기간 중 ‘허수아비’ 황제로 살았다. 청나라 역사상 최고 여걸로 통하는 서태후는 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불같은 성미의 서태후가 다가오면 그는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그러나 실권이 없다고 마음까지 편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정세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혼란했다. 청은 아편전쟁에서 패한 후 서구열강 이권의 각축장이 됐고, 청일전쟁까지 패하면서 아시아의 ‘종이호랑이’ 신세가 됐다.

1898년 광서제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길이라고 믿은 그는 서태후의 뜻을 거스르면서 ‘무술변법(戊戌變法)’이라고 불리는 개혁운동을 주도했다. 과거제 폐지, 신교육제도 도입, 화폐 통일, 철도 개설 등을 내건 무술변법의 기세는 초기에는 대단했지만 결국 100여 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목숨을 걸었던 개혁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광서제는 서태후에 의해 유폐됐고 1908년 죽음을 맞았다.

무술변법은 근대화를 이루려는 목적은 좋았으나 이상에 치우친 급진적인 개혁운동이었다. 광서제는 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 등 정치 경험이 일천한 학자들이 제안한 개혁운동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지 못했다. 운동은 기득권층은 물론 국민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무술변법은 메이지유신을 흉내 낸 것이었지만 일본 개혁세력의 철저한 현실인식과 지도층의 일치단결만은 따를 수 없었다. 무술변법과 거의 같은 시기에 시도된 조선의 갑오개혁도 비슷한 이유로 실패로 끝났다.

개혁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결국 ‘구호’가 아니라 ‘방법론’이라는 것을 한중일 역사는 말해준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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