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김기현]‘빵’없는 오렌지 혁명

  • 입력 2005년 1월 3일 18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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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3년 동안 독립국이었지만 자유로운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새해부터는 당당한 민주국가입니다.”

남아시아를 휩쓴 지진과 해일로 전 세계가 비통한 분위기지만 우크라이나 국민은 어느 때보다 희망찬 새해를 맞이했다.

다시 치러진 대통령선거 결과에 불복하며 버티던 빅토르 야누코비치 총리는 결국 2004년 마지막 날 사임했다. 수도 키예프 중심가 독립광장에 모인 수십만 명의 시민을 보면서 더 이상 민의를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날 밤 ‘오렌지혁명’의 현장인 독립광장에 시민이 다시 몰려들었다. 1991년 겨울 ‘독립’을 자축하는 축제가 벌어졌던 이곳에서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승리에 환호했다.

영하의 날씨에도 열기는 뜨거웠다. 모두가 장기 집권과 철권통치로 얼룩진 과거를 떠나보내고 직접 선출한 자유롭고 민주적인 새 정부를 갖게 됐다는 기대에 들떠 있었다.

승리의 주역 빅토르 유셴코 야당 후보가 단상에 올랐다. “나는 우크라이나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의문의 다이옥신 중독으로 얼굴 피부는 ‘오렌지 껍질처럼’ 딱딱하게 변했지만 그는 환하게 웃었다.

옛 소련에서 함께 독립한 후 1년 전 무혈 시민혁명으로 먼저 민주정권을 수립한 그루지야의 미하일 사카슈빌리 대통령은 축하 메시지를 보내 왔다.

독립 후 대부분의 옛 소련권 국가에는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물론 형식적이나마 선거와 의회제도가 도입됐고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언론 자유와 인권이 신장됐다. 그러나 장기 집권과 독재, 부패는 여전했다.

시장경제체제로 옮겨 가면서 생존에 급급했던 국민은 정치적 욕구를 표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민주화 열망이 화산처럼 분출한 것이다.

그루지야의 시민혁명이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으로 이어졌듯이 민주화 열기가 주변국으로 계속 확산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옛 소련권 전역이 민주화 열병을 앓는 일종의 ‘도미노 현상’이 나타나리라는 것이다.

광장에서 새해를 맞은 시민들은 새벽 무렵 흩어져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흥분과 열정이 가라앉은 자리에는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가 겨우 넘는 차가운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민주화를 이룬 뒤 국민에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보다도 경제 문제이다.

유셴코 후보의 측근인 아나톨리 마트비옌코 의원은 “우리는 승리했지만 어려움은 이제부터”라고 털어놓았다. 선거를 치르며 극심한 대립과 갈등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크라이나계와 러시아계로 나눠진 민족 대립, 서부 농업지대와 동부 산업지대의 지역 대결, 진보와 보수의 노선 갈등, 거기에 러시아와 서방까지 끼어들어 대리전을 벌였다.

민주화된 유셴코 정권은 이 모든 대립과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만 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참고 기다려 달라고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자신들의 힘으로 민주 정권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국민통합과 경제발전이 뒤따라 삶의 질이 높아지기까지 오렌지혁명은 미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김기현 모스크바 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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