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책의향기]‘전쟁터의 정신사-무사도라는 환상’

  • 입력 2004년 8월 27일 17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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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의 정신사-무사도라는 환상/사에키 신이치(佐伯眞一) 지음/일본방송출판협회, 2003년

요즘 일본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중에 ‘무사도(武士道)’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5000엔짜리 지폐를 장식하는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전에 국제 협조를 부르짖던 평화주의자로 존경받아 왔던 역사적 인물이다. 니토베는 미국 체재 중이던 1899년, 서양 사람들을 위해 영어로 쓴 이 책을 통해 고래로 일본인들이 숭고한 모럴을 가진 민족임을 서양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했다.

그런데 구미의 그리스도교 모럴에 대항한 일본 고유의 모럴을 서양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쓴 ‘무사도’가 구미에서 일본으로 역수입되자, 이번에는 일본인들이 무사도를 태고 이래 일본의 고유한 모럴로 믿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라스트 사무라이’나 ‘킬 빌’ 등과 같은 할리우드산 사무라이 영화의 여파가 최근 일본의 무사도 붐의 기폭제가 됐다. 역사가 에릭 홉스봄이 말한 ‘만들어진 전통’의 좋은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니토베가 역설한 것처럼, 과연 무사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인격을 도야하기 위한 정신수양이며, 사무라이들은 늘 정정당당한 페어플레이를 펼쳤던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번에 소개하는 책의 주제다. 일본의 중세문학 전문가인 저자 사에키는 ‘헤케 모노가타리(平家物語)’ 등 중세 중요 문헌 분석을 통해 사무라이의 행동은 페어플레이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 점을 지적했다. 적을 속이거나 야음을 틈탄 기습이 비일비재했으며, 때로는 공적을 혼자서 독차지하기 위해 동료들까지 속였다. 중요한 것은, 이 같은 행동들이 그 당시에는 결코 비난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무라이란, 본디 전쟁을 직업으로 하는 전투 집단이므로, 아무리 정직하고 근엄하다 해도 전쟁에서 지면 쓸모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인함을 과장하고, 동료를 배반하지 않는 것이 그 모럴의 중심이 된 것이다. 저자는 이런 점에서 사무라이 집단은 야쿠자(조직폭력단)와 매우 흡사하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니토베의 ‘무사도’는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전국시대가 끝난 에도(江戶) 시대 때 전투 경험이 없는 사무라이에게 무사로서의 정체성을 정신적으로 확립시킬 필요가 있었다. 또 사무라이들이 통치 관료로서의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 비전시(非戰時)의 사회도덕을 의식적으로 강화할 필요도 있었다. 그리고 메이지(明治)시대 무사라는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오히려 곡해되고 확대 해석된 무사도가 일본 국민 전체의 모럴로 등장한다.

따라서 니토베가 엮어 냈던 무사도는, 실은 근대 일본이 탄생시킨 자기 환상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환상으로서의 무사도’는 군국주의시대 일본 군부의 모럴로, 다시 지금은 일본문화론과 일본경영론으로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다. 원제 戰場の精神史-武士道という幻影.

이연숙 히토쓰바시대 교수·언어학 ys.lee@srv.cc.hit-u.ac.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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