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이념 과잉의 시대

  • 입력 2004년 8월 4일 18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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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초 시국사건인 ‘부림(釜林)사건’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의식화에 눈뜨게 된 당시 노무현(盧武鉉) 변호사는 변론을 위해 그때로선 ‘금서(禁書)’들을 빠짐없이 읽었다고 한다. 당시 386세대 대학생들의 필독서였던 ‘해방전후사의 인식’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등의 책이 그것이다.

엄혹했던 군사독재 시절, 분단과 냉전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한 새로운 민족·민중적 시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 책들은 큰 관심을 모았다. 반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반미숭중(反美崇中)의 논리적 기초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실제 ‘정신적 386’으로 불리는 노무현 대통령의 역사인식에 관한 발언은 임기 초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상당부분 이 책들에서 제시된 논리를 닮아 있다.

노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TV토론에서 밝힌 ‘대한민국은 분열주의 세력이 만든 나라’라는 인식이나 지난해 3·1절 기념식에서 우리 근현대사를 “정의는 패배했고 (친일 친미) 기회주의 세력이 득세했다”고 평가한 발언 등이 대표적이다.

노 대통령이 최근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가 제기한 국가정체성 문제에 대해 왜 하필 ‘유신으로의 회귀’와 ‘미래’가 양단간의 선택인 것처럼 응수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이 논리의 맥을 따라가면 쉽게 풀린다. ‘친일 친미 세력의 집합체’인 유신세력은 여전히 386의 의식 속에서는 타도의 대상인 셈이다.

여권 내의 386 운동권 출신들이 중심이 돼 추진하는 친일진상규명법 제정이나 국가보안법 폐지 등의 배후논리도 이와 맥을 같이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이런 점에서 386세대의 ‘집단의식’의 뿌리라 할 만한 이 책들의 논리는 20여년이 지난 오늘 한국정치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투쟁과 대결과 청산’이 화두(話頭)가 될 수밖에 없었던 80년대 초반의 논리가 오늘의 국가 어젠다로서 적합성을 갖고 있느냐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유신 당시 긴급조치로 구속됐던 한 야당 의원은 “냉전구도가 해체되고 세계화의 물결 속에 세계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오늘까지도 한국의 정치권이 이념과잉에 빠지는 것은 퇴행적 행태”라고 지적했다.

더욱이 이 같은 이념과잉의 상황은 최소한 동북아 지역에서는 우리에게만 뒤늦게 닥친 상황이다.

중국의 경우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체계적으로 진행해 온 연경화(年輕化·세대교체) 작업으로 중앙정부의 국장급 간부진을 대부분 40대와 50대 초반으로 교체했다. 명분은 세대교체였지만 사실은 이념과잉에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문화혁명’ 세대를 지워내고 실용주의로 내달리기 위한 작업이었다.

일본의 경우는 60년대 반미 안보투쟁을 주도했던 우리의 ‘전대협’ 격인 ‘전공투(全共鬪)’지도층이 아예 궤멸됐다. 한 통계에 따르면 안보투쟁 당시 각 대학 지도부의 67%가량이 자영업을 하고 있으며 정계에 진출하거나 중앙정부 간부가 된 사례는 거의 전무하다시피하다.

이런 상황을 돌아보면서 최근 한 중진 경제학자의 말이 귀에 생생히 되살아난다.

“우리 경제의 희망을 저는 요즘 대학생들에게 걸고 있습니다. 공부할 틈 없이 이념과잉에 빠진 386세대와는 다른 실용주의적 자세를 갖고 있거든요.”

이동관 정치부장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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