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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1월 19일 1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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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면권 남용 법치주의 훼손 ▼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대북송금 관련자에 대한 특별사면 문제도 법과 정치 사이에 발생하는 수많은 갈등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청와대와 정부측이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번 특별사면에는 두 가지 쟁점이 동시에 내포돼 있다. 하나는 과연 대북송금 관련자들에 대한 사면이 왜 필요하냐는 문제제기이고, 다른 하나는 사면제도의 취지가 무엇이냐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제기다.
사실 사면제도는 법치주의와 근본적인 모순을 일으킨다. 입법부와 사법부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법을 만들고 집행한다. 법의 준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법을 위반한 사람에 대해 형벌 등의 제재를 가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런데 이러한 제재를 백지로 돌리는 행위인 사면은 입법 및 사법적 절차의 모든 과정과 결과를 무효화하는 행위로서 법치 자체에 심각한 손상을 가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군주제의 유물인 사면제도가 현대 법치국가에도 존치되고 있는 이유는 예외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아무리 법치국가적 절차가 치밀하게 구성돼도 불합리한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이를 교정할 수 있는 구제수단을 하나쯤 남겨두려는 생각, 그리고 고도의 정치적 고려에 따라 법적 판단과는 별도로 국가이익을 위해 법치국가적 절차의 효과를 배제할 필요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사면권을 존치케 하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면은 말 그대로 예외적인 경우에만 인정돼야 한다. 대통령의 개인적 이해관계, 대통령이 소속된 정당이나 정파의 이익을 위해 사면권이 행사돼서는 곤란하다. 오로지 국가 전체의 중대한 이익을 위해서만 법치의 예외인 사면권이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헌정사에는 사면권 남용 사례가 많다. 삼일절, 광복절 등에 맞춰서 거의 정기적인 사면을 하는가 하면, 심지어 교통법규 위반자를 대상으로 수백만명을 한꺼번에 특별사면한 적도 있다. 그러한 사면권 행사는 법치를, 그리고 국민의 준법의식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다.
더 중대한 문제는 적지 않은 경우 사면이 정치적 복선에 의해 행사되는 의혹이 있다는 점이다. 선거에 임박해서 사면권 행사가 많았다는 점이 이런 의혹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사면이 과연 국민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의도했던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인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이미 우리 국민도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충분히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이를 수호하려는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엄격한 행사요건 정해야 ▼
물론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그 주변 집단 및 세력은 그와 같은 특별사면을 환영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정당성을 납득하지 못하는 다수의 국민이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이제는 1948년 제정된 뒤 한번도 손대지 않은 사면법의 개정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사면권은 대통령의 통치권에 속하는 것이라면서 그에 대해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게 하는 시대는 막을 내려야 한다. 더 구체적이고 엄격한 사면권 행사요건을 정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법 개정 이전에라도 대통령의 사면권이 사면제도의 정신에 부합되게 행사된다면 많은 갈등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장영수 고려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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