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칼럼]애국심 시험하는 사회

  • 입력 2004년 1월 2일 18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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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애국심이 아시아에서 상위권이라는 보도가 눈길을 끈다. 일본 도쿄대가 아시아 10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한국인 응답자의 85%가 ‘한국인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은 한국보다 낮은 수치다. 유교 문화권인 동양은 서양에 비해 전통적으로 공동체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한국인의 애국심이 중국과 일본을 앞섰다는 것은 단연 세계 최고 수준임을 의미한다.

미국은 국가적으로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성조기를 내세우며 의도적으로 애국심을 고취시킨다. 다인종 다민족 국가이기 때문에 애국심을 강조하지 않으면 국력 결집이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본의 우경화 흐름도 일본 젊은 세대의 애국심이 예전만 못하다는 증거다. 애국심에 흔들림이 없다면 애써 큰소리로 목청을 높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세계 최고의 애국심 ▼

이에 비해 한국인의 ‘못 말리는’ 애국심은 아직까지는 내부로부터 자연스레 흘러넘친다. 심지어 외국으로 이민을 간 사람들도 모국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고, 나이가 들면 상당수가 한국으로의 ‘U턴’을 원한다. 학교 교육에서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강조했던 탓도 있겠지만 아무튼 우리에겐 ‘자발적인 애국심’이라는 남들에게 없는 국가에너지가 있다.

하지만 누구나 믿어 의심치 않는 ‘애국심 전선’에도 이상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얼마 전 한 조사에서 대학생들에게 ‘이중국적자라면 한국과 미국 중 어느 나라를 선택하겠는가’라고 물었더니 절반 가까이가 미국을 선택하겠다고 응답한 것은 충격적이다. 젊은이들을 상대로 병역문제를 물어보면 ‘군대에 안 갈 수도 있다’는 대답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오래전부터의 일이다.

해외 이민에서도 전과 다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사회의 중심축을 형성해야 할 30, 40대 고학력자들의 이민 러시는 과거 먹고 살기 어려워 한국을 떠나던 것과는 분명 다른 양상이다. 이들은 자녀 교육을 이유로 내세우기도 하고, 일자리를 찾으러 간다고도 말하지만 그 저변에는 한국 사회에 대한 실망 좌절 불신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배어 있다.

이 같은 균열 현상은 국민으로 하여금 애국심을 스스로 회의하게 만든 결과다. 자신의 뜨거운 애국심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고 한국 사회가 그럴만한 가치와 희망을 지니고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회의를 불러온 것은 지도층, 특히 정치인의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서민에게 애국심은 과잉이지만 정치인에게는 애국심이라는 게 얼마만큼이라도 존재하는지 궁금하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국익과 선거를 두고 어느 한 쪽을 선택하라면 서슴없이 선거 쪽에 줄을 서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이다. 비리 국회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 처리에서 나타났듯이 사회 정의보다는 ‘그들만의 특권’과 당리당략에 매달리는 집단이 바로 정치인이다.

누가 더 더러운가를 놓고 다투는 꼴이 되어버린 대선자금 공방을 지켜보면서 이들에게 정치개혁을 맡긴다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일인가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이 총선을 앞두고 한 목소리로 정치개혁을 떠들고 있으나 더 이상 속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균열 부르는 정치인들 ▼

누구보다 애국심이 투철해야 할 정치인에게서 정작 애국심을 발견할 수 없는 게 우리 시대 최대의 불행이자 비극이다. 이런 정치인이 없어지지 않는 한 국민은 스스로의 애국심에 끊임없이 회의를 품게 되고 어느 한순간 애국심도 차갑게 식어 버릴지 모른다. 어느 나라든 국민이 한번 등을 돌리면 다시 애국심을 얻기는 어렵다.

새해가 밝았다. 오늘날의 애국심은 국가의 지도자들이 국민에게 눈물로 애절하게 호소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수호할 만한 사회가 된다면, 국민 모두가 그런 공감대를 이루면 애국심은 저절로 따라온다. 올해는 진정한 정치개혁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한 해가 되어야 한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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