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상영/미래를 보는 눈, 재벌을 보는 눈

입력 2003-06-17 18:43수정 2009-10-10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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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 산업혁명을 거쳐 세계 최강국이 된 영국은 생산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 자유무역 정책을 강요했다. 하지만 뒤늦게 산업화를 시작한 독일과 미국은 자국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보호무역을 채택했다. 자유무역을 했다가는 영국과 프랑스에 국내시장을 모두 내줄 판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유무역과 보호무역 중 어떤 것이 옳으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국가가 정책을 선택할 때의 기준은 어느 쪽이 국내사정에 더 부합하며 유리한지를 따지면 되는 것이다. 자유무역을 주장한 나라나 보호무역을 택한 나라나 각각의 실정에 맞는 정책을 택한 것이다.

한국경제는 초단기 압축성장 과정에서 ‘재벌’이라는, 외국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자원도 부족하고 시장마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가가 가진 자금과 인력을 몇몇 산업과 회사에 집중 지원하면서 생겨난 산물이었다. 이 전략은 성공했고 한국은 세계가 놀랄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한국 국민은 재벌을 국가가 만들어낸 국민적 자산의 성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같은 국민정서에 대해 재계는 기업가들의 창의력과 결단이 재벌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고 항변하곤 했던 것이 과거 국내 재벌 논의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최근 SK사태를 계기로 국내 진보진영 내에서 벌어진 재벌 논쟁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숙하고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경영의 투명성과 주주중심 경영을 강조하는 참여연대는 국내기업이 잘못하면 외국자본에 의해 인수합병(M&A)될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반면 ‘자본에도 국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대안연대는 재벌의 긍정적 측면에 주목하면서 앞으로도 활용가치가 크다고 보고 있다. 외형적으로만 보면 참여연대는 미국 월스트리트의 시각과 비슷하고 대안연대는 재계의 입장을 상당 부분 인정하고 있다.

특히 좌파에 가까운 대안연대가 재벌에 대해 ‘국민경제의 성장엔진으로서 계속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대안연대는 미국식 주주중심 경영에 대해서도 ‘주주 배당을 우선시해 중장기 투자를 가로막기 때문에 지속적 성장을 제약할 수 있다’면서 한국에는 맞지 않는 제도라고 주장한다. ‘기득권적 보수(재벌)와 민족자본주의를 주장하는 좌(대안연대)가 일맥상통했다’는 참여연대의 공격이 이어졌다.

도시국가인 싱가포르와 홍콩을 제외하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 선진국이 된 나라는 없다. 제대로 된 영토와 인구를 가진 국가 중 한국은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가능성이 가장 큰 나라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참고할 만한 외국의 사례가 없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으로는 세계 13위지만 1인당 국민소득은 이제 막 1만달러를 넘은 세계 54위 국가에 불과하다. 당분간은 새로운 성장엔진을 계속 발굴해야 할 처지이다. 엄청난 격차로 앞서간 미국 일본 유럽 국가와 우리의 발전전략이 같을 수 없다. 이들 선진국의 현실을 반영한 경제이론이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재벌에 대한 논의는 ‘개혁도 중요하지만 재벌이 아직도 한국경제에 유효한 전략이 될 수 있는가’라는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김상영 논설위원 you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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