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임채청/˝최상의 善은 물과 같은 것˝

  • 입력 2002년 12월 31일 17시 10분


민심이란 ‘물’은 권력이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수능재주 역능복주·水能載舟 亦能覆舟). 4·19혁명이나 6월민주화항쟁을 떠올릴 필요도 없다. 민주화 이후 직선제로 뽑은 세 대통령의 부침이 꼭 그랬다. 취임시엔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지만 퇴임시엔 어김없이 돌팔매질과 손가락질을 당했다. 민심은 ‘도취한 권력’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는 법이다.

도취의 초기징후는 치자(治者)가 자신의 집권에 과도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세월의 흐름에 매듭이 있을 수 없고 서민의 살림살이 역시 누가 집권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리 없는데 ‘문민정부’니 ‘국민의 정부’니 규정하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새 정부는 그냥 ‘노무현 정부’라고만 했으면 좋겠다.

도취의 중기징후는 단편적 성과나 소소한 치적을 부풀려 실정과 비정의 얼룩을 덮으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꼴이 되고 말지만…. 그리고 최악의 말기징후는 스스로 눈과 귀를 막은 채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YS정권의 노동법파동이나 DJ정권의 의원꿔주기 등이 이에 해당한다. 권력은 흔히 착각하지만 민심의 눈과 귀는 밝다.

그런데도 권력은 건망증이 심하다. 전임자들의 실수와 과오를 알면서도 되풀이하곤 한다. 미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낸 레온 파네타가 “워싱턴엔 명백한 교훈마저 배우려는 사람이 없다. 모두 자기방식대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 든다”고 지적한 것은 한국의 경우에도 딱 들어맞는다.

새해 새아침 노무현 대통령당선자에게 상기시키고 싶은 게 있다. 중국역사상 가장 빛나는 ‘정관(貞觀)의 치(治)’를 연 당 태종이 신하들에게 “그대들은 짐을 위해 수 양제의 죽음을 기억해주시오”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전임자들의 성공보다는 실패로부터 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개혁도 현실의 토대 위에서 엉킨 것을 풀고 어지러운 것을 가지런히 하는 방향이어야 순항할 수 있다. 다 뒤엎고 새로 벌이는 식이어선 국정표류만 자초할 위험이 크다. 불처럼 태워버리는 게 아니라 물처럼 촉촉이 적시는 개혁, 가르는 게 아니라 아우르는 개혁, 돌아보는 게 아니라 나아가는 개혁이 돼야 한다.

노자는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상선약수·上善若水)고 했고, 맹자는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으면 나아가지 않는다’(유수지위물야 불영과불행·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고 했다. 현 정권보다도 소수정권일 수밖에 없는 새 정권의 개혁이 순리를 따르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려운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거대야당과의 관계나 세대교체 문제 등이 특히 그렇다. 밀어붙이거나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노 당선자가 메워야 할 우리사회의 웅덩이도 어느 때보다 많고 깊다. 세대 계층 이념 갈등이 심화되고 있고, 지역갈등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 겸허함 넉넉함 유연함과 같은 물의 미덕을 갖춰야만 이런 웅덩이를 메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노 당선자의 반미시위 자제호소에선 유연함을 느꼈으나, ‘청탁하면 패가망신’과 같은 어법은 겸허함이나 넉넉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덧붙인다. 마침 올해는 ‘세계 물의 해’다.

임채청 논설위원 cc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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