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홍사종/대통령은 냉장고가 아니다

  • 입력 2002년 12월 15일 18시 37분


요즈음 TV광고에서 국내 가전 양사의 냉장고는 초지일관 냉장고를 선전하지 않는다. 화면 속에 놓인 자사의 냉장고, 즉 물건의 ‘기능’은 이미 언급되지 않은 지 오래다.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모델을 통해 연출된 고품격, 꿈, 사랑, 행복과 같은 감성적 이미지다.

▼후보 TV광고 감성 일변도▼

‘○○는 사랑입니다’(A사) ‘여자라서 행복하다’(B사) 등 엉성한 것 같지만 고도로 계산된 모델들의 속삭임 속에서 눈부실 만큼 매력적인 냉장고가 탄생한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국내 가전사들이 냉장고를 선전할 때 ‘성에 안 끼는 냉장고’ ‘에너지 효율 높은 냉장고’ 등을 이슈로 삼았던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는 시청자도 많을 것이다. 이제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냉장고가 왜 사랑이냐?’ ‘여자라서 행복한 것하고 냉장고가 무슨 연관이냐?’고 따져봐도 소용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한 마디로 세상이 변했고, 시장이 확 바뀌었다는 얘기다. 합리주의와 이성이 지배하던 시장이 온통 감성지배로 옮아갔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의류시장도 마찬가지다. 오래 전 시장에서 옷을 살 때 내세운 중요한 기준은 옷감의 질과 바느질 상태였다. 그런데 요즈음 소비자들에게 옷감과 바느질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브랜드이고 디자인이다. 느낌으로 물건을 사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읽은 탓인지 최근 대통령후보들의 TV광고도 냉장고 선전 못지않게 감성 일변도다. 감성을 자극해야 시장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뛰어난 통찰력의 결과인데, 이 중 압권은 한 후보의 ‘비전’편과 또 다른 후보의 ‘눈물’ ‘기타 치는 대통령’편 등이 아닐까 한다. 나라 경영의 자신감을 이미지에 담거나 눈물과 기타를 매개로 미래상을 그려냈는데 꽤 잘 만들었다. 나의 경우도 후보들이 만든 매력 앞에 일순 뭉클하게 매료됐으니 시장을 압도하는 감성의 힘이 정말 대단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순간 아무리 시장이 그렇게 변했다 해도 국가 경영을 하겠다는 대통령후보가 ‘감성’에 의존해 표를 모으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인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또 그 감성으로 잔뜩 부풀려 놓은 장밋빛 미래가 실현 가능한 일인가도 회의적이다. 사실 누가 대통령이 돼도 지금 우리나라의 산적한 국가적 과제를 풀어나가는 데는 많은 난관이 있음을 모르는 이가 없다.

꼬여버린 대북 대미 관계,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노사·지역문제, 그리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국가빚과 가계빚, 세상 부모들의 애간장을 끓게 하는 교육문제 등은 뿌연 꿈과 막연한 희망만을 제시하는 감성적 영역 밖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절체절명의 국정과제가 곧 국민 모두에게 닥칠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계층에게 인고(忍苦)와 희생을 요구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냉장고’ 식의 행복예감(?) 광고를 만들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기회에 편승, 유권자의 감성을 자극해 정권만 잡으면 된다는 발상은 선거 후의 더 큰 혼란만 부채질할 뿐이다. 막연하게 부푼 기대는 무너질 때 더욱 요란한 소리를 내게 마련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고 그 시장이 변한다 해도 대통령 선거만은 이성과 합리주의의 기반 위에서 치러져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성적 판단으로 투표해야▼

그런 뜻에서 우리 정치 소비자들은 후보들 진영에서 쏟아내는 이성적 판단이나 분별력을 잠시 마비시킬 ‘감성’ 일변도의 TV 선거전략에 현혹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감성’에 전적으로 의존한 선전전략은 ‘기본을 다지면서 만들어 나가야 할 국가경영이라는 상품’을 과대포장해 소비자인 국민에게 팔려는 시장교란 행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지나칠 정도로 과열되어가고 있는 대통령선거의 양상을 냉혹한 현실의 바탕 위에서 멀리 보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감성의 시대에 무슨 ‘쉰 소리’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겠지만, 국민의 생명과 미래를 담보할 대통령을 뽑는 일은 결코 냉장고 사는 일과 다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냉장고가 아니다.

홍사종 숙명여대 교수·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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