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고승철/'기업 엑소더스'

  • 입력 2002년 12월 8일 18시 43분


조선의 막사발. 일본 전국시대의 지도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것을 ‘환상의 도자기’라 극찬하면서 이것으로 다도(茶道)를 즐겼다. 임진왜란 때 다이묘(영주)들은 조선 도공을 다투어 붙잡아 갔다. 막사발을 만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땅에서는 흙투성이 몸으로 평생 천민으로 지내던 그들은 ‘예술가’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실명(實名)을 붙인 자신의 도자기를 만들 수 있게 됐다. 마음껏 예술혼을 불태우며 명품을 빚어냈다. 400여년 전 남원에서 끌려간 한 도공은 10여대를 이어오면서 ‘심수관’이란 브랜드를 자랑스럽게 쓰고 있다.

조선 도공을 대한 태도의 차이. 그것이 오늘날 한일 국력의 격차가 아닐까. 주자학이 지배하던 조선에서 사농공상(士農工商) 서열은 엄격했다. 지배자의 가렴주구(苛斂誅求) 탓에 생산주체이던 농민, 상인들은 허리가 휘었다.

세월이 몇 백년 흐른 요즘은 어떤가. 민주주의 사회니, 디지털 정보화 시대니 하지만 권력자가 민간을 하대(下待)하는 케케묵은 분위기는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지금도 정부기관은 툭하면 민간기업 대표들을 불러 이것저것 지시하며 혼낸다. 가계대출을 너무 많이 했으니 줄여라, 출자총액 한도를 벗어나는 투자를 하지 말라, 세계박람회는 엄청 중요한 행사이니 재계가 뛰어 유치할 수 있도록 하라….

참다 못한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최근 작심한 듯 포문을 열었다. 박 회장은 한 세미나에서 “역대 정권들은 집권 초기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차기 정부에서도 이 약속이 실현되지 않으면 우리 기업의 ‘엑소더스(해외탈출) 현상’이 더욱 심해질 것이다”고 경고했다.

박 회장은 “규제가 완화됐다고 하지만 이는 단순히 양적인 성과이고 기업의 발목을 잡는 새 규제들이 생겨나는 게 최근의 현실”이라고 꼬집으면서 “어느 분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립 서비스’가 아닌 행동으로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주는 게 소망”이라고 말했다.

기업들의 엑소더스 현실은 어떤가. 작년 국내 제조업의 대외투자는 36억달러, 외국인의 대한(對韓) 제조업투자는 25억달러로 들어온 ‘씨앗’보다 나간 것이 더 많았다. 대한상의가 올 5월에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지역 제조업체 213개 가운데 44.1%가 생산거점을 이미 해외로 옮겼으며 ‘이전을 계획 중’이라는 업체도 33.8%나 됐다.

한국의 개발연대에서 기업과 기업인은 정경유착 때문에 불신의 대상이 됐다. 그래서 기업을 성토하면 그것이 정의(正義)인 양 여겨지기도 했다. 비리를 저지른 기업은 지탄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국부(國富) 창출의 주역인 건전한 기업마저 도매금으로 당하기 일쑤였다.

정부가 온갖 규제로 기업활동을 옥죄고 노사평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데다 물류비용이 올라가면 제조업체들은 줄지어 한국을 떠날 것이다. 주5일 근무제 등 근로자를 위한다는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성향의 정책은 우선 보기엔 그럴듯하다. 하지만 잘못하면 경쟁력을 잃은 기업들이 공장 문을 닫고 그 앞에서 근로자들이 빈손으로 앉아있는 결과가 빚어질 것이다.

민간의 창의성이 꽃피어 투자가 활성화하고 일자리가 생기도록 하려면? 정권을 쥔 사람이나 관료들이 진정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려면?

권력자들이여, 몸을 낮추시라.

고승철 경제부장 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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