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철칼럼]이렇게 벗겨도 됩니까

  • 입력 2002년 12월 4일 17시 54분


백주 대로에서 일순간 발가벗긴 알몸이 됐다면 그때의 당혹감이란 어떤 것일까. 더욱이 그런 알몸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면, 사이코 영화나 포르노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 아닌가. ‘벌거벗은 사회.’ 그렇다. 지금 우리는 자기만 모르지 벌거벗고 다닌다. 영화가 아니라 하루하루 생활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나라당이 폭로한 도청자료 속의 한국사회는 그야말로 홀랑 벗은 모습이다. 우선 그 대상으로 청와대 여야 정치인 고위관료 언론인을 광범위하게 겨냥한 데다 통화내용이란 것도 국정농단이란 말이 딱 어울릴 정도다. 드러난 치부가 그렇게 흉하고 역겨울 수가 없다. 결국 두 번 죽이고, 죽은 셈이다. 또 한편 도청자료 뭉치를 한나라당의 주장대로 현직 국가정보원 직원이 제공한 것이라면 개인만 아니라 국가도 벌거벗었다는 이야기다. 남을 벗겼다고 쾌재를 부르다가 자기도 벗고 말았으니 이쯤 되면 ‘벌거벗은 사회’란 말이 별로 과한 것도 아니다.

▼수치심을 잃은 사회▼

도청자료의 진위 여부에 대한 검찰수사로 얼마나 진상이 밝혀질지 모를 일이지만 ‘사실이다’ ‘조작이다’ 주장하는 어느 한 쪽은 엄중한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보면 사회적 신분이 분명한 인사들이 도청의 표적이 됐던 통화를 인정하는 터여서 조작주장만으로는 이번 사건을 뒤집기 어렵게 됐다. 정권의 도덕성이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를 헤아리고 어떻게 심판해야 할지는 이제 국민이 판단할 일이다.

까놓고 말해서 도청에 대한 공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집이나 사무실의 전화통화는 물론 서울의 몇몇 음식점에서도 말조심하라는 귀띔이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또 무엇이 그리 궁금한 것이 많은지, 이제는 폐쇄회로 TV도 숨겨놨을지 모른다며 몸을 사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게다가 각종 명목으로 들락날락거리며 들춰보는 은행계좌도 이젠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이런 지경이라면 감추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모든 국민의 통화와 금융거래 내용을 초슈퍼 컴퓨터에 등록하고 공개하면 어떤가. 국정의 투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 효율적인 통치기술이 어디 있겠는가. 컴퓨터 산업도 육성한다며 과감히 예산을 집행할 만하다. 어차피 이런 저런 도청에 드는 은밀한 비용도 상당하지 않겠는가.

도청이란, 그 음습한 어감처럼 발가벗고 벗기는, 수치심 잃은 사회를 뜻한다. 우리가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도청만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는 수치심의 상실이다. 수치심을 잃은 개인이 무슨 짓인들 할지 모르는데 하물며 권력이 수치심을 모를 때 사회는 어떻겠는가. 현 정권 들어 유난히 자주 불거진 대통령 친인척 비리를 포함한 각종 권력부패 사건도 따지고 보면 수치심 모르는 정권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잃은 것은 수치심만이 아니다. 공동체를 유지해온 윤리나 도덕과 같은 기본적이고 정상적인 규범이 함께 무너지고 있다는 데 더 큰 심각성이 있다. 그 실례가 선거판이다. 정상적인 것보다 꼼수 묘책이 판을 치고 있으니 악순환의 고리는 더욱 단단해지고 있는 것 같다. 선거 때만 되면 모두가 개탄하면서 버려야 할 악습으로 꼽는 지역감정 인신공격 흑색선전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풍조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그만큼 개탄하고 경계했으면 사라져도 벌써 사라져야 할 망령들이 왜 아직도 머리 위를 감돌고 있는가. 지름길로만 가려는 ‘꼼수중독증’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 맨 앞엔 으레 정치지도자를 자처한 사람들이 섰고, 이에 휘말린 분위기에서 그동안 ‘기초규범’쯤 무시하는 정치지도자를 양산했다. 그런 지도자가 무슨 경쟁력이 있겠는가. 지난날의 국정혼란을 돌아보면 안다.

▼사회 존엄성도 무너져▼

결국 이 정권은 부패한 권력만 남긴 것이 아니라 기본규범까지 흔들어 놓고 가는가 보다. 권력이 수치심을 잃을 때 국민은 자존심을 잃고 사회적 존엄성도 훼손되고 만다. 한국사회의 존엄성이 어느 정도인지 남들과 비교할 것도 없다. 우리끼리 서로를 얼마나 대접해 주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지금 권력을 향해 존엄성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짓인 줄 안다. 그들은 이번엔 선거를 발가벗겨 보는 일에 더 관심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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