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재건위사건 이란

  • 입력 2002년 9월 12일 18시 47분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이란 중앙정보부가 1974년 유신 반대 투쟁을 벌인 민청학련을 수사하면서 배후 세력으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 이를 북한의 지령을 받은 지하조직으로 규정해 관련자 8명을 사형에 처한 사건이다.

인혁당 재건위란 1964년 발생한 1차 인혁당 사건 연루자들이 당 재건을 기도했다며 중정이 붙인 이름이다. 1차 인혁당 사건은 64년 8월 중정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획책한 인민혁명당 사건을 적발해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 중에 있다”고 발표하면서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발표와는 달리 1심에서 도예종(都禮鍾)씨와 박현채(朴玄采·당시 서울대 강사)씨에게 각각 징역 3년과 1년의 실형이 선고됐을 뿐 나머지는 모두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수사 과정에서 서울지검 검사 3명이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의 기소에 반발해 사표를 내기도 했다.

1차 인혁당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 만에 인혁당은 중정에 의해 민청학련의 배후로 다시 지목됐으며 중정은 1차 인혁당 사건 재판 과정에서도 실체가 입증되지 않은 인혁당이 ‘재건’을 기도했다고 주장했다.

1차 사건 당시 검찰총장이던 신직수(申稙秀)씨와 수사담당 중정 요원이던 이용택(李龍澤)씨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때 각각 중앙정보부장과 수사를 지휘하는 중정 6국장으로 등장했다.

이들이 이끄는 중정은 민청학련에 연루된 이철(李哲), 유인태(柳寅泰), 이강철(李康哲)씨와 친분이 있던 여정남씨(전 경북대 총학생회장)를 매개로 혁신계 인물들을 수사했고 최종적으로 인혁당 재건위가 북한의 지령을 받아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했다고 결론내렸다.

1024명이 연루된 인혁당 재건위 및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253명 중 이철, 김지하(金芝河)씨를 비롯한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75년 2월 대부분 석방됐지만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23명은 모두 석방에서 제외됐다. 75년 4월8일 주요 관련자인 서도원(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도예종, 이수병씨(일본어학원 강사) 등 8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고 판결 20시간 만인 다음날 오전 6시 형이 집행됐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의 사형이 집행된 75년 4월9일을 ‘사법 암흑의 날’로 규정했었다.

사형당한 8명은 대구 경북 지역에서 꾸준히 민주화 운동을 해왔지만 전국적으로는 무명인사들이었다.

유신체제 2년째에 접어들어 격렬한 반체제 운동에 직면한 유신정권은 권력을 지속시키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고 유명 인사 대신 주목을 덜 받는 사람을 희생양으로 택했다고 인권단체와 관련 전문가들은 주장해왔다.

지명도가 높은 사람들을 사건에 관련시키면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게 되고 허점이 노출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

황진영기자 bud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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