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축 컨넥션]철거용역 이권경쟁 폭력 얼룩

  • 입력 2002년 8월 12일 18시 42분


지난해 11월 서울 송파구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가락동 시영아파트 재건축조합 창립총회 때의 모습. - 동아일보 자료사진
지난해 11월 서울 송파구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가락동 시영아파트 재건축조합 창립총회 때의 모습. - 동아일보 자료사진
《연간 80조원대로 추정되는 재건축 시장은 건설업체들에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 이 때문에 건설업체들은 재건축 사업을 수주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해당 주민들에 대한 금품 살포와 매수, 폭력배를 동원한 상대 건설사 등에 대한 협박과 청부폭력 등…. 하지만 건설사들은 자신들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철거용역계약 등을 미끼로 조직폭력배와 연계된 합법적인 철거용역업체 등을 통해 이런 일들을 대신하게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건축 사업을 둘러싼 건설사와 ‘조폭’들의 공생관계를 3회에 걸쳐 시리즈로 소개한다.》

그동안 재건축 사업 수주와 관련해 건설사와 조폭의 연계가 소문으로는 많이 나돌았으나 최근 서울 송파구 가락동 가락시영 1, 2차 아파트 재건축 문제를 둘러싼 ‘청부폭력 사건’으로 표면에 드러나기는 처음이다.

▽김정균 청부폭력사건〓6월29일 오전 10시경 재건축이 추진되고 있는 서울 송파구 가락동 가락시영아파트 관리사무소 앞. 여러 대의 승용차 등에 나눠 탄 짧은 머리의 건장한 괴청년 30여명이 우르르 사무소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괴청년들은 사무소에서 가락시영 2차 아파트 동대표 회장 김씨에게 S사와 H사, 다른 H사 등 3개 컨소시엄 건설사가 설치한 홍보물을 철거하라고 지시한 이유를 따지다가 갑자기 달려들어 김씨와 김씨의 측근 채형기(菜亨基·39)씨를 집단 구타했다.

김씨가 집단 폭행을 당한 표면적인 이유는 아파트 단지 곳곳에 널려있는 각종 건설사들의 홍보물 철거를 아파트 경비원들에게 지시했기 때문이지만 이 같은 이유만으로 폭력배 30여명이 동원됐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

하지만 김씨가 가락시영아파트의 터줏대감이며 주민들 사이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의문은 풀린다. 김씨는 1999년 재건축추진위원회가 개최한 조합창립총회에서 재건축 컨설팅사인 H사와 H건설이 맺은 계약은 무효라며 총회를 무산시킨 바 있다. 이후 그는 3개 건설사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일해왔지만 최근에 사이가 틀어졌다. 이 때문에 컨소시엄을 맺은 3개 건설사로서는 7월13일 자신들을 지지하는 비상대책위원회가 개최하는 총회에서 김씨가 ‘찬물을 끼얹는 것’을 막아야 했던 입장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된 철거용역업체인 유피의 직원은 경리담당 여직원을 포함해 10여명. 대부분 회사 운영에 필요한 사무직 직원이다. 본보 취재팀이 확인한 결과 이날 김씨의 집단 구타에 동원된 폭력배는 전남 나주파와 신안파 소속이었으며 사전 계획 하에 동원된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는 “3개 건설사가 후원하는 조합의 창립총회를 앞두고 유피로부터 참석하지 말라는 협박을 몇 차례 받았다”고 말했다.

▽건설사와 조폭의 유착 의혹〓이번 사건과 관련돼 수배됐다가 12일 경찰에 구속된 유피의 김빈 이사(41)는 지난해에도 폭력배를 동원, 당시 가락동 시영아파트 재건축추진위원회 이사였던 이모씨를 폭행해 구속된 적이 있다.

철거업계에 따르면 철거업체가 건설사와 용역 계약을 할 경우 3000가구를 기준으로 컨설팅 비용 30억원, 철거비 120억원, 이주관리비 50억∼100억원 등 대략 200억∼250억원을 받게 된다.

이에 따라 철거용역을 따내기 위해 혈안이 된 철거용역업체들은 재건축조합이 설립되기 이전부터 연계를 맺고 있는 건설사로부터 건설관리용역비를 받아 해당 건설사에 우호적인 조합 설립과 조합장 선출을 위해 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철거용역회사들이 책임진다.

경찰이 압수한 유피의 회계 장부에 따르면 유피는 2월27일 컨설팅 비용으로 S사로부터 2680만원, 철거공사비로 H사로부터 2500만원, 용역비로 또 다른 H사로부터 2500만원을 받았다. 또 사건 당일인 6월29일 창립총회(7월13일) 용역비 명목으로 S사로부터 1억1640만원, H사와 또 다른 H사로부터 각각 8730만원씩을 받는 등 기업으로부터 수시로 용역비를 받아왔다.

한 철거용역업체 관계자는 “총회용역비는 총회가 끝난 직후 받는 게 일반적인데 6월29일에 받은 돈은 사건 수습 비용이나 도피비용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축소 수사 의혹과 반론〓서울 수서경찰서는 사건 발생 며칠 만에 수사에 불만을 표시한 담당 형사를 다른 부서로 전보시켰다. 경찰서 담당자는 폭력 사주 의혹을 받고 있는 건설사들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조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가 취재팀이 12일 공식 해명을 요구하자 3, 4명을 불러 조사했다고 말을 바꿨다.

전보된 경찰관은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차량의 소유주에 대한 소환조사도 하지 않았으며 소환된 유피 이모 사장(45)에게 지나치게 대우를 잘해주는 등 수사방식에 문제가 있어 몇 차례 상사와 말다툼을 했는데 갑자기 부서 이동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수서경찰서 측은 12일 본사에 보낸 해명자료를 통해 “건설사 관계자들을 상대로 조사했으나 폭행 관련 혐의를 발견하지 못했고 전보 경찰관은 다른 이유로 전보됐으며 유피 이 사장은 당초 2차례 구속 지휘를 검찰에 건의했으나 변호사 선임 후 2000만원을 공탁해 불구속 지휘가 내려왔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또 “발견된 차량 소유주에 대한 소환조사는 불러도 오지 않아 못했다”고 해명했다.

유피의 이 사장은 “집단폭행 사건은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누구로부터 사주를 받은 것은 아니다”며 “우리 회사는 조폭과 관련이 없을뿐더러 정상적인 업무만 담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3개 건설사 컨소시엄 관계자는 “사건 얘기는 들었지만 우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라며 “유피는 아직 정식 철거용역 계약을 맺은 단계도 아니고 설사 철거용역 계약을 맺더라도 계약 금액이 100억원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훈기자 dreamland@donga.com

박민혁기자 mhpark@donga.com

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가락시영 1,2차…95년부터 추진 최대규모▼

가락시영 1, 2차 아파트는 1980년과 81년 서울 송파구 가락동 12만평 부지에 건설됐다. 1차 3600가구, 2차 3000가구 등 모두 6600가구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재건축 아파트 중 단일 아파트 단지 재건축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다. 공사비만도 1조5000억원.

재건축사업은 1995년 10월 가락 1차 아파트 재건축추진위원회가 구성되면서 본격화했지만 지금까지 난항을 겪고 있다.

1999년 11월 기존의 추진위원회에 대항하는 비상대책위원회가 생겨나 주민들이 양쪽으로 갈라졌으며 건설사들도 각각 자신에게 유리한 주민단체를 지원해왔다.

1, 2차 추진위를 합친 재건축합동추진위원회는 1999년 11월 창립총회를 열고 시공사를 선정하려 했지만 S사의 지원을 받은 비상대책위원회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후 S사와 H건설 등 3개사는 공동으로 컨소시엄을 구성, 재건축 공사를 맡기로 합의했다.

비상대책위원회를 지원하고 있는 3개 건설사는 7월 경기 성남시에서 비대위 주최로 열린 조합 창립총회에서 자신들이 시공사로 선정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합동추진위도 이에 앞서 4월 독자적인 조합 창립총회를 열고 정통성이 있는 조합을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태다.

현재 가락아파트 단지에는 대립 중인 추진위와 비대위 외에도 다른 3개의 비대위가 구성됐으며 이들 사이에 정통성을 주장하는 각종 소송이 진행 중이다.

박민혁기자 mh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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