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상신/너희가 역사를 아느냐

  • 입력 2002년 7월 31일 18시 50분


역사가는 과거를 사실대로 재건할 수 있기 위해 우선 불편부당한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서술해야 한다. 이 원칙은 이미 고대시기에 세워졌다. 그러나 이 원칙은 오랫동안 잘 지켜지지 못했다. 불평등한 사회질서가 오랫동안 계속돼왔고, 또한 합리적 사고가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역사는 자주 왕권이나 교권, 또는 당대의 지배계급들의 사주에 의해 어용적, 당파적으로 서술돼 왔다.

▼고교 교과서 현정권 미화라니▼

역사서술의 이러한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19세기 초의 랑케가 제시했던 대로 역사가는 자신의 현재 관념과 사고형식에 따라서 과거를 평가해서는 안 되며 특히 현재의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만 이 과제는 인간의 인식의 한계성과 이미 형성되어 있는 각자의 당파적 의식구조 때문에 지극히 어렵다. 그러므로 20세기 초의 베커를 비롯한 여러 역사가들은 객관성을 ‘고상한 꿈’이라고 지적하면서 역사는 결국 주관적으로 서술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일이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객관적 태도를 포기하는 변명이 아니라 그것을 지키는 데는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객관성은 모든 역사가들의 이상으로서 객관적 태도를 세우는 일은 역사가의 1차적 덕목으로 인정되어 왔다.

역사가에게 필요한 제2의 덕목은 여러 사건의 복합적인 관계들을 관찰하여 그 진행을 역사발전의 연속성 속에서 파악하는 능력이다. 역사가는 사건들을 별개의 것이나 또는 한 시대의, 또한 각자의 인식한계 속에서만 파악해서도 안 된다. 그는 자기 당대의 경향적인 사고형식과 조류를 극복해야 하고 여러 지역과 영역의 발전들을 통시대적으로 관찰하면서 그 발전들의 공통적인 내용과 성격을 종합하여 주된 흐름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현재의 모습으로 전개되어 왔던가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기 위해 그는 특정한 정치 경제적 이념이나 민족주의적 사고, 특히 한 시대의 정치 당파적 가치에 편향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보편주의적 사고를 갖추어야 한다.

그래도 역사가에게는 어려움이 또 있다. 다름 아니라 과거와 함께 역사에 포함되고 있는 현재를 서술하는 일이다. 이 현재는 지금 전개되는 중이므로 비록 그 부분적인 광경들이 적나라하게 관찰될 수는 있겠으나 그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기란 과거의 경우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며 또한 여기에서는 지배 권력의 당파적인 영향이 강력하게 작용한다.

이번에 교육인적자원부가 선정한 도서검정위원회 심사에서 합격한 4종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가 현정권의 미화로 서술되고 있다는 파문은 바로 그러한 사례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현재사가 흔히는 취급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책임 있는 역사가들은 이를 회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역사는 뒷시대의 진행에 따라서 항상 새로이 해석될 수 있으므로 현재의 서술을 주저할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그만큼 여기에서는 ‘불편부당하게’, 그리고 ‘전체적인 관계 속에서’라는 원칙을 보다 더 엄격하게 적용하는 윤리가 요구된다.

이번 교과서에서 현정권에 대한 치적으로 지적된 사실들이 현재의 일부 사람들에게 그것 자체로 명백한 업적으로 보인다 해도 그 진행속도와 방법, 그리고 주도자들의 의도 여하에 따라서 시대가 지나면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 또한 현재에서 이미 분배의 정의가 사라졌고 문화 일반이 저속해졌고 대중, 특히 지도층이 전반적으로 도덕 불감증에 빠져 있다면 그러한 업적도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현재 사실들이 일방적으로 업적으로서 나열되는 것은 다른 분야의 실정과 실패를 호도하기 위한 조급함에서이다.

▼정권 영향력서 벗어나야▼

예를 들면 제주도 4·3사건, 4·19혁명, 5·16군사쿠데타 등의 사건이 역대 정권에 따라서 다르게 서술됐듯이 현재의 사실들이 집권당파에 의해, 또는 그 영향 하에 서술되어서는 안 되고 업적으로 보이는 사건들도 어디까지나 전체적인 발전관계들 속에서 긍정적 부정적인 의미와 함께 언급돼야 한다. 그것도 다른 각도의 평가들과 비교 검토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요컨대 현재에 대한 하나의 평가와 서술이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또한 언제나 누구에 의해서도 시도될 수 있지만, 그것이 일시적으로나마 공인될 수 있고, 특히 ‘교육의 자료’로 활용될 수 있기 위해서는 현재가 정관(靜觀)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시간적 경과와 거리가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지배집단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다름 아니라 역사교과서는 모두에 의해 합의된 해석들을 담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상의 조건을 갖추지 못할 때 현대사 서술은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이상신 고려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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