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빚 권하는 사회

  • 입력 2002년 5월 24일 18시 48분


지난 대학입시에서 법대와 의대 선호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의대에는 자연계 수능시험 고득점자들이 1등부터 거의 순서대로 입학했다는 통계도 있다. ‘돈 되는 전공’에만 학생들이 몰린 것이다. 학계에선 머리 좋은 인재들이 인문대나 이공대를 기피하는 것에 대해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다. 앞으로 시간이 흐른 뒤 우리가 기초학문을 외면한 대가를 톡톡히 치를 터이지만 학생들로서는 시장경제 논리에 따른 선택일 뿐이다. 미국 대학생들의 꿈이 ‘젊어서 은퇴하기’, 즉 일찍 큰돈을 벌어 인생을 즐기며 사는 것이라지만 우리 역시 ‘돈이 최고’라는 가치관이 확실하게 자리잡은 것 같다.

▷돈은 버는 것 못지 않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지만 젊은 세대의 ‘돈 쓰는 지혜’는 아직 부족해 보인다. 기업들의 가장 손쉬운 마케팅 전략은 젊은 세대를 타깃으로 잡는 것이다. 10, 20대들이 큰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돈을 펑펑 잘 쓴다는 것은 나쁘게 말하면 기업이 이들을 ‘봉’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일단 쓰고 보자는 잘못된 소비 심리에서 비롯된 신용카드 빚 문제도 이들 연령대에서 가장 심각하다. 부모 세대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끝없이 자식 뒤를 돌보려는 부모들의 전통적인 가족주의, 온정주의가 이들의 씀씀이를 키운 것이다. 돈에 대한 열망은 자본주의 사회에 걸맞게 커졌지만 자기 책임을 생각하고 절제하는 훈련은 전근대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엊그제 정부가 현금서비스 한도를 축소하는 등 신용카드 대책을 내놓았지만 이 또한 우스꽝스럽다. 개인신용 문제는 스스로 관리하는 것인데 정부가 나선다는 것은 신용사회가 아직 멀었음을 인정하는 꼴이다. 정부는 다른 한편으로 돈 쓰기를 유혹하는 각종 제도를 남발해 왔다. 카지노 복권 등 사행산업을 확대하면서 인허가권을 쥐고 권력 행사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각종 ‘게이트’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 많다. 그렇다면 건전한 소비를 장려하기에 앞서 카드 남발을 방치한 것도 결국 정부 아닌가.

▷‘자식을 망치려면 용돈을 많이 주라’는 얘기가 있다. 요즘은 ‘용돈’이란 말 대신에 ‘카드’라는 말로 바뀔 법하다. 신용카드는 우리 사회에서 앞길 창창한 젊은이들을 자칫 범죄자로 내몰 수 있는 위험천만한 물건이 되고 말았다. 자식에게 신용카드를 쥐어주기 이전에 돈을 적절하게 쓰는 지혜와 인내심을 먼저 가르칠 일이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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