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창]김석수/가상공간의 질서를 잡자

  • 입력 2002년 5월 24일 18시 33분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는 신용카드 때문에 상상도 하기 싫은 비인간적인 사건들이 잇따라 일어나고 있다. 지난달 김모, 허모씨가 카드 빚 800만원을 갚기 위해 6명의 여자를 살해하여 암매장하려고 했던 반인륜적인 범죄가 발생했고 그 전에는 모 대학 학생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카드 빚 때문에 수방사 총기를 탈취해 은행을 털려고 했던 끔찍스러운 사건도 발생했다.

이처럼 신용카드와 죽음이 상호 밀접한 관계로 부각되고 있다. 신용카드는 우리의 범죄 구성에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는 것이다. 왜 딱딱한 카드 한 장이 우리의 삶을 이렇게 흔들어 놓는가. 카드가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인가.

▼플라스틱카드가 현금 대체▼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며 바로 그러한 무한성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매력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그동안 현실공간 안에서 충분한 만족을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상적 공간이나 가상적 공간 안에서 삶의 만족을 확보하려고 했다.

그래서 고대나 중세의 인간들은 형이상학적 사유를 통해 현실적 공간이 아닌 초월적 공간에서 절대자에게 자신을 의탁함으로써 이 세상의 유한한 삶이 가져다 주는 모든 문제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근대의 시민혁명이 보여주었듯이 근대인들은 초월적 공간의 영원한 삶에 대한 보장을 미끼로 전개된 제도 종교의 타락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마침내 그들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오로지 자신만을 믿는 삶을 구축하고자 했다. 바로 이 같은 정신에서 발현된 것이 과학기술의 문화이며 이것은 더 이상 초월적 공간이 아니라 현실공간을 가공한 가상적 공간에서 자신의 영원성을 마련하려는 방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처럼 오늘의 세계는 사이버세계, 가상공간의 세계가 점점 확장되면서 마침내 현실공간보다 더 위력을 갖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 가상공간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소유하고 있지 않은 공간이지만 앞으로 무궁무진하게 소유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은 갖지 못한 자에게는 모험과 도전의 공간이자 자신의 현재의 부족함을 위안 받을 수 있는 대리만족의 공간이다.

카드 역시 나에게 지금 존재하지 않는 현금을 보완해줄 수 있는 가능적 현금으로 언제나 나의 부족 분을 메워주는 고마운 금고이기도 하다. 카드를 소지하고 있는 사람은 지금 자신의 주머니에 현금을 지니고 있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현실공간에서 이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매력적인 공간과 그곳에서 작동하는 카드가 그냥 버려져 있을 리 없다. 이제는 현실공간이나 현물 내지는 현금을 점유하는 것보다 사이버공간이나 사이버 물건 내지는 화폐를 점유하는 것이 더 중요한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다. 이에 따라 범죄도 점차 후자와 관련된 부분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점차 현실공간보다 가상공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과 물건들이 자신을 구속하는 족쇄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과거 초월적 공간에 심취했던 맹신의 시절에 잘못된 제도적 종교가 마약으로 변질되어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듯이 가상적 공간에 심취하는 오늘날의 환상의 시절에는 오용된 과학기술이 마약으로 변질되어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사이버범죄에 병드는 인간▼

그동안 카드와 관련해 발생했던 반인륜적인 범죄행위는 가상공간이라는 마약에 중독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약을 확보해야 하는 마약중독자에게는 마약을 갖고 있는 자들 모두가 당연히 범행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카드라는 마약을 소유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들도 이런 상황 속에서 희생된 형태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사이버섹스의 범람과 해커들의 난립으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범죄행위들도 이런 형태의 일종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저 암울한 종교의 시대에 벌어진 비극을 되새기면서 신화화된 가상공간의 틀을 바로잡아야 한다. 개인은 가상공간의 마약을 경계해야 할 것이며 국가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가상공간에 관련된 제반 규율을 정립하고 나아가 교육현장에서 이런 현상이 제대로 인식되고 올바르게 교육될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김석수 경북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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