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타]프랑스의 영웅 플라티니

  • 입력 2002년 5월 8일 17시 17분


98년 프랑스월드컵 우승국이자 2002월드컵의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는 프랑스. 최강 프랑스의 역대 최고 선수는 과연 누구일까? 2000년 12월 프랑스 선수출신으로 구성된 선정위원회는 ‘20세기 최고의 선수’로 미셸 플라티니를 뽑았다. 98프랑스월드컵과 2000유럽축구선수권대회 우승주역인 지네딘 지단은 2위였다.

플라티니는 ‘그라운드의 예술가’라는 별명에 모든 것이 함축돼있다. 그는 항상 적절한 볼배급을 포함한 게임운영 능력과 득점력에서 천재적 모습을 보여줬다.

사실 볼배급은 1950년대 전설적 선수인 레이몽 코파가 훨씬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다. 득점력은 58년 스웨덴월드컵에서 코파의 어시스트를 받아 13골을 터뜨려 득점왕에 오른 쥐스틴 퐁텐이 더 파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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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플라티니의 위대성은 플레이메이커와 득점력을 두루 갖췄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공격형 미드필더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새로 제시한 선수가 바로 플라티니다.

플라티니에게 단 하나 부족한 점을 찾자면 바로 월드컵 우승경력이 없다는 것. 유럽선수권우승(84), 유럽 최우수선수(MVP) 3회수상, A매치 72회에 41골(역대프랑스선수 최다) 49회 주장 역임 등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지만 월드컵에선 78년 아르헨티나월드컵부터 86년 멕시코월드컵까지 세차례 참가해 처음엔 조예선 탈락, 이어 연속 4위와 3위에 머물렀다.

미셸 플라티니(왼쪽)가 지난해 11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후계자’지네딘 지단(오른쪽)에게 유럽 최우수선수(MVP) 트로피를 건네고 있다.동아일보 자료사진

그러나 66년 잉글랜드월드컵 이후 본선 무대를 밟아보지 못한 프랑스가 단기간에 4강에 연속 오를 만큼 성장한데는 플라티니의 발끝과 머릿속에서 나온 예술축구 덕이라는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승패를 떠나 월드컵에서 그가 보여준 환상적인 드리블과 게임을 읽어내는 능력, 빈공간을 어김없이 파고들어 날리는 슈팅에 전세계 축구팬은 탄성을 자아낼 수 밖에 없었다. 정확한 상황판단에 따라 각을 잰 것처럼 만들어내는 프리킥은 그가 창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티니는 1955년 파리 동쪽 뫼르테모젤지방의 인구 1만1000명의 촌구석인 죄프에서 태어났다. 민족으로 따지면 그는 순수 이탈리아인. 아버지 알도 플라티니는 물론 그의 어머니도 이탈리아 태생이다. 게다가 가업이 이탈리아 식당이었다.

‘그라운드의 예술가’ 미셸 플라티니가 86년 멕시코월드컵 브라질과의 준준결승전에서 동점골을 터트린뒤 환호하고 있다. ‘축구황제’ 펠레는 이경기를 ‘세기의 최고경기’라고 극찬을 했다.게티이미지본사특약

축구클럽 활동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시절부터 축구를 배운 플라티니는 17세이던 72년 최초의 좌절을 당한다. 고향팀인 AS죄프에서 프로테스트를 받았으나 폐활량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던 것. 그래서 그는 그의 말처럼 ‘고향을 등지고’ 라이벌인 AS낭시로렌느로 갔다.

그의 최고 전성기는 82년 이탈리아 토리노의 유벤투스로 가면서부터. 82∼83시즌부터 은퇴한 86∼87시즌까지 세리에A 2번 우승(83∼84, 85∼86), 유럽챔피언스컵우승(85) 등을 일궈냈고 개인적으로 득점왕 2차례에 유럽 MVP에도 3년 연속 올랐다.

플라티니는 현역은퇴 후 88년부터 92년까지 프랑스대표팀 감독을 지냈다. 비록 92년 A매치 7경기에서 4무3패의 형편없는 성적으로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통산으로는 16승8무5패를 거뒀다.

플라티니의 또 한가지 위대한 점은 이후 축구 행정가로 변신, 98프랑스월드컵조직위원장을 역임한 후 현재 프랑스축구협회 부회장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전 창기자 j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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