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코너에 몰린 DJ

  • 입력 2001년 11월 5일 18시 28분


DJ가 코너에 몰려 있다.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반전(反轉)의 기회를 노리기에는 너무 늦은 게 아닌가도 싶다. 민심은 떠났고 집권당은 자중지란(自中之亂)이다. 오랜 민주화 투쟁에서 얻어진 카리스마도, 그와 같은 시대를 걸어온 여느 정치인에게서 찾아볼 수 없던 ‘경이로운 진보성’도 빛을 잃었다. 노벨평화상의 영광은 빛 바랜 사진첩 속에 묻혀버렸다. 가장 소중한 지지세력이었던 ‘비지(비판적 지지자)’의 대다수가 등을 돌렸고 이제 남은 것은 몇몇 ‘동교동 가신’과 정서적으로 그를 떠나기 어려운 일부 호남사람들뿐이라면 너무 가혹한 소리일까.

▼‘苦言’과 ‘惡手’▼

97년 12월19일, DJ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새벽에 월간 ‘신동아’ 편집장이던 필자는 잡지 머리의 ‘데스크 칼럼’에 이렇게 썼다.

“대통령 당선자께서는 40년 고난의 정치 역정을 통해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해왔다고 했습니다. 대통령 당선자의 민주주의를 향한 집념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겠지요. 그러나 기대와 믿음이 크면 클수록 불안과 우려도 그만큼 커지기 마련이지요. 더구나 당선자의 승리 뒤에는 ‘과반의 반대’가 있습니다. 당선자의 민주 의지가 그들 ‘과반의 반대’까지 아우르지 못한다면 또다시 치유하기 힘든 반목과 분열의 나락으로 이 나라가 굴러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가신(家臣)을 멀리하십시오. 그들의 충성과 헌신의 대가는 ‘주군’을 기어이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자부와 긍지에 그쳐야 합니다.… 경계할 것은 또 있습니다. 문민독재지요. 당선자의 카리스마와 권력의 속성이 맞아떨어진다면 언제라도 현실화할 수 있는 우려입니다.”

지나간 일을 되짚어봐야 부질없다지만 지금 와서 옛 글을 들춰보니 기가 막히다. ‘과반의 반대’를 아우르기는커녕 세상은 내편 네편 가르기로 찢어져버렸다. 지역감정은 더욱 나빠졌다. 가신의 위세는 국정을 주무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집권당은 내내 제 소리를 내지 못한 채 청와대 눈치 살피기에 급급했다. 집권당의 소장 개혁파의원들이 인적쇄신 국정쇄신을 해야 한다고 읍소에 시위를 벌여도 노벨상 받고 와서 한다고 했다가 가뭄 때문에 미룬다고 하면서 근 1년을 끌었다.

DJ는 노벨상 수상 직후 약속을 지켰어야 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 공약했던 대로 당 총재직을 내놓고 여야(與野)를 아우르는 ‘큰 지도자’의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필자는 그 무렵 본란을 통해 제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노벨상 효과가 있는 지금이 타이밍이라고 수차례 ‘고언(苦言)’했다. 그러나 집권측이 선택한 것은 ‘의원 꿔주기’에 의한 DJP 공조 복원이었다. 그 DJP가 9개월 만에 다시 돌아섰고, 이제는 집권당에서조차 공공연하게 ‘DJ당’으로는 안된다고 하니 ‘고언’을 ‘악수(惡手)’로 받은 격이 아니던가. 스스로 내놓는 것과 밀려서 내놓는 것은 천지차이다.

집권측은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를 살피기보다는 무엇을 잘 했나부터 입에 올리려 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극복에, 남북 정상회담에, 정보화에, 무슨무슨 개혁에…. 나라가 시끄러운 것은 오직 야당의 발목잡기와 일부 언론의 무책임한 비판 때문이라며 ‘네 탓’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언론개혁을 앞세워 몇몇 신문 ‘박살내기’에 나섰다. 물론 ‘네 탓’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네 탓’을 앞세워서야 그게 어디 집권세력이라고 하겠는가.

▼마음 비운 ‘마지막 리더십’을 ▼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실망이 다시 분노와 체념으로 바뀌면서 민심이 돌아섰다. 그런데도 권력의 불감증은 여전하다. 청와대에서는 재·보선 졌다고 뭐 그렇게 걱정할 것 있느냐는 식의 소리가 들리고 가신들은 누구 덕에 정권 잡았는지 아느냐며 기세 등등하다. 그 와중에 당의 한 대선 예비주자는 DJ의 부름이라는데도 “하늘이 두 쪽 나도 안 간다”고 목청을 높인다. 어차피 이제는 ‘고삐 풀린 말들’이어서 누군들 고분고분 ‘DJ의 말씀’을 따를 것 같지도 않다. 이래저래 DJ는 코너에 몰렸다.

이제 어쩔 것인가. 진정 마음을 비워야 한다. 그리고 국민을 감동시킬 수 있는 ‘마지막 리더십’을 보여야 한다. 정말 큰 틀의 국정쇄신을 해야 한다. 더는 망설일 여유도, 재고 말고 할 시간도 없잖은가.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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