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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6월 14일 18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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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제주과학고 3학년 박은경양(18)은 넉넉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물리학자의 꿈을 키워가고 있는 기대주.
수필 주제인 ‘내가 과학자가 되고 싶은 이유’에 대해 박양은 뜻밖에 “아버지를 위해”라고 대답해 눈길을 끌었다.
제주 밀감농장 5자매집 막내딸. 하지만 짧게 내뱉는 말투, 귀 위까지 바짝 쳐올린 머리모양은 영락없는 선머슴이다.》
“어릴 적에 농약을 치러 아버지를 따라 과수원에 갔어요. 1m, 2m 높이의 큰 물탱크가 나란히 있었는데 큰 탱크의 물을 작은 탱크로 옮겨야 했죠. 무거워서 들 수도 없고…. 난감하게 서 있는데 아버지가 굵은 호스를 하나 들고 오셨어요.”
호스 한쪽을 큰 탱크에 깊게 찔러넣고는 손바닥으로 다른쪽 끝을 막았다 떼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콸콸콸∼.”
책을 통해 배운 지식이 과학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박양은 그 세찬 물줄기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물통 위에 기어올라 안간힘을 쓰며 기어이 내 힘으로 물꼬를 텄을 때의 환희가 제가 과학자를 꿈꾸게 하는 힘입니다.”
한참 뒤에야 이것이 ‘사이펀(siphon) 원리’라는 걸 알게 됐다.
“아버지는 비록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지만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과학이 진정한 과학’이라는 걸 가르쳐 주셨습니다. 중2때 병으로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하루 빨리 과학자가 되고 싶습니다.”
제주과학고 1회인 박양이 선택한 동아리는 물리반과 문예반. 물리반에서는 그가 주역이 돼 지난 겨울 제주교육청 인터넷방송국 개국기념으로 ‘도깨비도로의 신비’라는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도 했다.
분명히 오르막인데 시동을 끈 자동차가 올라가고, 낮은 데로 흘러야 할 물이 위로 올라가는 도깨비도로의 비밀이 착시현상에 있다는 것을 실험으로 입증했다.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직접 확인한 결과라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다.
올 3월 대만에서 열린 과학전람회에도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전국 과학전람회에서 특상을 받은 팀 중 영어인터뷰를 통해 최종 수상자로 결정된 것. 영어실력은 또 어떻게 쌓았는지 궁금했다.
그는 “아직 잘 못하는데…”라면서도 △영자신문이나 잡지를 항상 옆에 두고 짬짬이 읽기 △인터넷으로 영어채팅 하기 △큰 소리로 영어책 읽기를 ‘비결’로 꼽았다.
현재 성적? ‘절대 비밀.’ “중학교 때는 최상위였지만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난다긴다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페이스를 유지하느라 전전긍긍했었다”고 말하는 것을 봐서는 한동안 고전한 듯. 하지만 이제는 나름대로 방법을 찾았다.
“실현 가능한 공부 분량을 정해놓고 그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날 끝내요. 참고서나 문제집은 하나만 정해 파고들지요.”
그가 생각하는 우리 과학의 가장 큰 문제점은 깊이있는 실험위주 교육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박양은 “과학을 생활과 동떨어진 학문으로 여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며 “주변 일에 호기심을 갖고 조금만 원리를 생각해보면 과학에 쉽게 다가갈 수 있을 텐데…”라고 안타까워했다.
과학고 생활에 만족하느냐는 질문에는 두 말 않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해발 550m 한라산 중턱에서 전교생 57명이 기숙사 생활을 하며 16명의 선생님과도 친구처럼 지내는 제주과학고.
“내신 최상급을 받기는 어렵지만 작은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과학자로서의 꿈을 키울 수 있는 ‘높이 나는 갈매기형’이라면 과학고가 제격입니다.”
박양은 물리학자의 다부진 꿈을 이렇게 펼쳤다.
“물리는 모든 과학의 기초라고 하잖아요. 소립자물리에서 우주물리까지 다양한 분야를 익혀 세계의 석학들과 견줄 만한 훌륭한 과학자가 되겠습니다.”
<김현진기자>brigh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