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추진 중인 의대 증원 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의료 개혁이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의료 현장의 우려가 이토록 깊은 이유는 명확하다. 정책의 근간이 돼야 할 의사인력 추계가 과학적 정밀함을 결여한 채 성급하게 결정됐기 때문이다. 국가 의료 체계의 백년대계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검증’과 ‘현장성’이 사라진 결과다.
정책의 신뢰도는 과정의 투명성과 객관적 근거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번 의사인력 추계는 방법론적 측면에서 ‘주먹구구식’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미국이나 네덜란드 같은 선진국들은 의사 수 결정에 있어 인구 구조의 변화는 물론이고 인공지능(AI) 등 의료 기술의 발전, 의사의 노동 시간, 은퇴 연령, 심지어 진료 과목별 특수성까지 포함해 수십 가지의 다변수 모델을 활용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이러한 정교한 검증 절차를 생략한 채 단편적인 지표에만 의존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학적 방법론에 기반하지 않은 수치는 정책적 신뢰를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한 예측마저 어렵게 만든다.
무리한 증원이 초래할 의학교육 현장의 붕괴 또한 우려된다. 의학교육은 단순히 강의실에 학생을 채우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양질의 의사를 배출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수의 교수진과 해부 실습 자원, 그리고 체계적인 임상 수련 환경이 필수다. 준비되지 않은 대규모 증원은 실습 환경의 질을 악화시켜 임상 역량을 갖추지 못한 의사를 양산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의료 서비스의 질 저하로 이어지며 국민 건강권 보호라는 정책 본연의 목적에 역행한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비과학적 추계에 기반한 결정이 미래 세대에게 막대한 부담을 전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의사인력의 팽창은 의료 수요의 증가로 이어질 수 있어 건강보험 재정에도 큰 타격을 줄 가능성이 있다. 정부에서 추계한 의료 수요대로라면 미래의 20, 30대가 짊어져야 할 건강보험료는 천문학적인 수준에 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는 기성세대의 정책적 과오가 다음 세대의 경제적 고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감사원 보고서에서 지적했듯이 이번 의사인력 추계 결정 과정에서는 현장 점검과 기초 데이터 확보라는 필수적인 행정 절차가 부재했다. 의료 현장의 실질적인 수용 능력이나 필수의료 현실, 지역별 편차를 정밀하게 점검하지 않은 채 총량 중심의 탁상공론식으로 도출된 결과는 국민과 의료계 모두를 납득시키기 어렵다. 현장을 외면한 정책은 실패로 이어지고, 그 실패의 비용은 국민이 나눠 짊어지게 된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숫자’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투명하고 과학적인 검증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의료계와 전문가가 머리를 맞대고 납득 가능한 데이터를 구축하는 것이 우선이다. 미래 세대에게 건강한 의료 체계를 물려주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올바른 방향성과 과학적 정직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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