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이 힘]일본어 없이 방송 못한다?

  • 입력 2001년 4월 26일 11시 56분


드라마 야외 촬영 현장이나 쇼 프로그램의 녹화장에서 스탭이나 연기자들의 대화를 유심히 듣다보면 이상한 단어들이 오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번 장면은 그냥 데모치로 찍자." "형, 아까 그 구다리 참 좋았어." "아까 그 부분은 깃칵기가 맞아야 하는데, 좀 안 맞았어." "이 노래는 사비부터 기가 막혀요."

‘데모치, 가케모치, 가이다마,간지,구다리,깃칵기,다치마와리,시바이,돗푸, 사비’

일반인들은 한번 들어 도저히 뜻을 알 수 없는 이 단어들은 방송 제작현장에서 자연스럽게 쓰이는 용어중 일부이다. 언뜻 건설 현장의 작업 용어를 연상시키는 이 단어들은 원래는 충무로 영화가에서 사용하던 용어들이다.

단어의 느낌에서 알 수 있듯이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대부분 일본어이다.데모치는 ‘카메라 들고 찍기’,즉 '핸드-헬드 촬영'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이다마는 ‘대역’,간지는 ‘느낌’,구다리는 특정 장면의 흐름이나 ‘시퀀스’를 뜻하는 일본식 용어.

또 깃칵기는 특정 연기를 하게 만든 ‘계기’,다치마와리는 ‘치고 받는 활극 장면’,시바이는 ‘연극조의 장면’, 돗푸는 영어의 ‘톱(top)’에서 유래된 프로그램의 첫 장면을 뜻한다.주로 가요계에서 쓰이는 '사비'는 노래의 전주 부분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56년 KORCAD-TV가 우리나라 최초로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한 이래 60년대 말까지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인력의 대부분은 비슷한 영상 장르인 영화 쪽에서 영입했는데 이때 일본식 용어들이 함께 흘러 들어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30여년이 넘게 흘렀지만 당시 유입됐던 일본식 용어는 여전히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다.그냥 일본식 용어를 한국 용어와 섞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중요한 표현이나 단어는 일본식으로 말하다 보니, 이 말을 모르면 현장에서 '눈 뜬 장님'이 되기 쉽다.

기자도 처음 방송 현장에 갔을 때 정신없이 오가는 일본식 전문용어를 알기 위해 '방송용어사전' 말미에 있는 고쳐야할 방송의 외래어 도표를 복사해서 말이 나올때마다 표를 보고 해석을 했던 경험이 있다.

전문집단끼리 사용하는 용어가 어떻든 그 결과가 좋으면 시청자로서야 별로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첨단의 장비를 다루고 늘 시대를 앞서나가는 전문가 집단으로 불리는 방송에서 아직도 50여년 전 일제시대의 잔재가 남아있는 용어가 쓰인다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이다.

더구나 이제 갓 대학을 졸업했거나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는 10대 스타들의 입에서 이런 일본식 용어가 아무 거리낌없이 오가는 모습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그리 유쾌한 장면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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