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우의 게임월드]'거리'

  • 입력 2001년 4월 22일 19시 02분


게임은 삶을 비껴간다. 남루하고 지루한 삶을 게임 속에서까지 겪고 싶은 사람은 없다. 삶은 늘 지나가는 거리에서도 지겹게 마주친다. 지치고 화가 나고 슬픈 사람들의 얼굴을 만난다. 게임에서까지 그런 얼굴을 대하기는 싫다. 하지만 평범한 삶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해주는 게임도 있다.

‘거리’(일본 춘소프트·98년 출시)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임이다. 이 게임은 조금은 생소한 사운드 노벨이라는 장르의 게임이다. 화면 가득 나오는 이야기를 책을 읽듯 읽어나가다 가끔 나오는 분기점에서 선택을 해주면 된다. 그러다 보면 하나의 단편 소설이 완성된다.

‘거리’는 시작할 때 나오는 여덟 명 중 한 명을 선택해 이야기를 시작한다(나중에 한 명이 추가된다). 귀국한 외인 부대원 같은 특이한 사람도 있지만 대개 쉽게 만날 수 있는 그저 그런 사람들이다. 게임을 좋아하는 소년계 형사, 야쿠자, 악역 전문 조연, 뚱뚱해서 애인에게 차인 여성, 핸섬해서 인기 좋은 남자 고등학생 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무 관계없이 서로 스쳐지나갈 뿐인 사람들을 묶어주는 건 그들이 사는 거리다. 이들은 모두 ‘시부야’ 거리를 지나간다. 그 거리에서 부딪히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면서 인연을 맺는다.

인연을 맺는다고 해서 거창한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다. 그냥 우연히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러다 쇼핑백이 바뀌는 것 같은 작은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한다. 사소한 일이긴 하지만 그 사람의 삶을 조금은 바꿔놓는다. 운이 나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

며칠 동안 벌어지는 작은 만남과 작은 사건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에는 지구 정복을 노리는 대마왕이나 이를 저지할 운명의 용사 같은 건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 게임에 매달린다. 어차피 늘 겪는 삶을 게임에서까지 찾아간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살다 보면 선택을 해야 할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선택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어떤 걸 선택하든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우연히 주운 종이 한 장이 나의 인생과 세계의 운명을 바꿔놓는 건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거리에서 벌어지는 일들, 보통 사람의 삶의 이야기들은 인생을 화려하게 빛내 줄 만한 일이 절대 될 수 없다. 기껏해야 신문 사회면에 한 줄짜리 기사로 실리고 사라져버릴 정도다.

하지만 보잘것없는 한심한 삶에서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삶의 즐거움은 일생 한 번 있을까 말까한 화려한 사건에 있지 않다. 어이없는 일들, 대단치 않은 일들이 중요하다. 사람을 잘못 보고 달려들었다가 봉변만 당하거나, 애인에게 차여 다이어트를 하다가 홧김에 더 먹어 살이 더 찐다든가 하는 게 인생이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은 그런 일들로 가득차 있고, 그 즐거움에 의해 삶이 위안받는다. ‘거리’를 플레이하면 그런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발견한다.

(게임평론가)SUGULMAN@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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