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사람들은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

  • 입력 2001년 4월 20일 18시 49분


◇사람들은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이승우 소설집/348쪽, 8000원/문학과지성사

‘신이 사망했음, 유언 없음.’

사르트르가 19세기 시인에 대해 쓴 책의 첫 문장이다. 당시 신의 고아를 자처했던 프랑스 문학이 처한 정신적 공황을 요약한 재치가 사르트르답다.

그런데 지난해 이승우의 작품이 프랑스에서 각별한 관심과 호평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묘한 상상을 했다. 프랑스가 보여준 관심이란 것은 실상 그들이 오랫동안 들판에 방치해둔 신의 무덤을 여태껏 돌보고 지켜왔던 사람에 대한 가책과 호기심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번에 발표된 이승우의 소설집이 다시 프랑스말로 번역된다면 그들이 외면한 가치에 대한 향수와 성찰은 다른 데에서 촉발될 것이다. 근래 서구 소설에서 아버지, 어머니, 삼촌, 누이동생이 한 밥상머리에 마주한다는 설정(‘첫날’)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집 없는 유랑의식을 내세우는 그들에게 집의 의미를 되새기는 작가의 진지한 제안은 사뭇 비장하게 들릴 것이다. 집의 해체를 다루다보면 자연스레 가족의 최소 단위인 부부관계에 초점이 맞춰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집의 균열이 근래의 우리 소설에서 신물나게 보아온 외도나 불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정체 모를 이물감, 소외, 단절, 이른바 실존적 불안(‘멀고 먼 관계’)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이승우가 다른 소설가와 크게 갈라지는 지점이다.

집안을 떠도는 악취와 거기서 야기된 막연한 불안(‘집의 내부’)이나 의미가 모호한 희생제의를 통해 미지의 존재를 에둘러 드러내는 방식은 우리에겐 다소 낯설지만 이른바 실존주의라 불리는 사르트르나 카뮈의 작품과 나란히 진열되면 어색하지 않게 보일 것이다.

이승우가 내수보다 수출에서 돋보인 이유는 다른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미문이나 섬세한 감상은 번역 과정에서 감수해야 할 손실 분이 크고 문화적 배경이 다른 독자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 반면, 정치한 문장과 논리적 전개방식은 번역 손실도 적고 서구 독자에게 익숙한 수사법이다.

예컨대 ‘초인종이 울려 문을 열었다’라는 식보다는 먼저 이 시간에 누가 방문했는지를 따져보고 초인종의 지속 시간에 따라 미지의 인물의 신분과 성격을 추론하고, 다시 아무에게나 덜컥 문을 열지 않는 자신의 내면까지 되돌아보는 이승우의 소설은 우리보다는 서구 독자에게 자연스런 서술방식인 것이다.

이렇듯 작가는 직관이나 감각보다는 주로 논리에 의존해 미지의 존재로 다가가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문장 단위에서부터 작가가 구사하는 차분한 설득에 유의하는 독자에게 적합한 소설가이다.

이재룡(숭실대 교수·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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