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암리타

  • 입력 2001년 4월 13일 19시 20분


간밤 꿈에서 봤던 이상형을 길거리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가? 처음 방문한 거리에서 언젠가 와봤던 듯한 낯익은 느낌이 들었던 적은?

삶의 모퉁이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감. ‘키친’으로 국내에도 알려진 일본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가 즐겨 다뤄온 테마다.

이야기는 젊은 여성 사쿠미가 사고로 잃은 기억을 회복하는 과정을 사분사분하게 따라간다. 그의 곁에는 영적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누나를 보호하려는 어린 동생 요시오, 그리고 자살한 여동생의 애인 류이치로가 있다.

‘기억은 곧, 리트머스 종이처럼 서서히 되살아났다. 다만 나와 나 사이에 있는 투명한 유리막에, 마치 손목시계가 물에 젖었을 때처럼 물방울이 어리고 말았다.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다.’(57쪽)

두 사람과의 범상하지 않은 관계 속에서 사쿠미는 점차 과거의 기억을 회복해간다. 하지만 기억을 잃기 전의 그와 기억을 회복한 뒤의 그는 같지 않다. 시공을 넘나드는 신비한 상황의 체험에서 물방울처럼 영롱한 삶의 이유를 발견한다.

작가는 생의 신비를 ‘늘 거기에 충만하게 있으면서도, 쉽사리 만질 수 없는 찬란한 것’(488쪽)이라 말한다. 그로 인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삶을 사랑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기억을 회복한 사쿠미는 류이치로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모든 것이, 여기에 있는 이유를 잘 알겠습니다’(353쪽).

숙명적으로 아픈 과거와 불안한 미래를 가진 생에 대한 끄덕임, 인도 신화에서 신에게 불멸을 가져다 준다는 생명의 감로수 ‘암리타’는 자기 내면에서 샘솟는다는 깨달음이다.

80년대 말 등단 때부터 자신을 신비주의자(occultist)라고 말한 바나나는 줄곧 상실의 상처, 그 슬픔을 이겨나가는 사랑의 양상을 따뜻하게 그려왔다. 이 소설이 특별하다면, 바나나의 작품 전편에 깔려 있는 ‘인간관계의 신비성’이란 테마를 전면에 다뤘다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첫 장편소설인 만큼 ‘키친’이나 ‘허니문’ 같은 중편에 비해 이야기 밀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요시모토 바나나 장편소설

501쪽 9500원 민음사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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