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이창호의 철벽방패 구멍 뚫렸다

  • 입력 2001년 3월 12일 11시 58분


◇이세돌 3단에 연패 등 이상징후… 목표상실 따른 권태감·후배들 도전에 부담감 작용한 듯◇

이세돌 3단의 연승은, 한국바둑의 세대교체를 예고하는 ‘쿠데타’였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른다. 이창호 9단의 연패는, 이창호 독주시대의 마감을 예고하는 ‘예고탄’이다.

2월26∼27일 서울 코엑스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제5회 LG배 세계기왕전(우승상금 2억5000만원) 결승1, 2국에서 이세돌 3단이 예상을 뒤엎고 이창호 9단에게 2연승을 거뒀다. 이창호를 상대로 한 판을 건지기도 쉽지 않은 터에 그것도 두 판 모두 이9단의 대마를 잡으며 화끈한 KO승을 거두다니, 매스컴들이 ‘반상의 대파란’이라는 헤드라인을 일제히 뽑을 만했다.

LG배의 결승전은 5번기이다. 2승을 거두었다고는 하나 아직 세 판이 더 남아 있다.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조치훈 9단의 경우는 도전 7번기에서 먼저 3연패를 당하고도 내리 4연승을 올리는 기적 같은 대역전극을 어디 한 두 번 해냈던가. 초반 2연승을 거두었다고는 하나 상대가 ‘천하의 이창호’이고 보면 아직 샴페인을 터뜨릴 단계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세돌 3단의 초반 2연승에 장안이 이토록 떠들썩한 까닭은, 이는 역설적으로 이창호 9단의 그늘이 그만큼 넓고 짙었다는 말일 것이다.

◇올 전적 8승7패… 겨우 반타작

바둑에 관한 한 이창호라는 존재는 오르기 힘든 태산준령의 정도를 넘어 거의 바둑신(神)적인 영역이었다. 지난 10여 년간 그는 무적함대였다. 89년 첫 타이틀 획득 이후 지금까지 차지한 국내외 타이틀 획득 수만 98회. 이중 세계타이틀 획득 수만도 14회에 이른다. 게다가 이제 불과 26세의 혈기방장한 청년.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정점에 이른 연령이 아닌가. 그런 까닭에 바둑계의 모든 사람은 “적어도 이창호의 독주시대가 향후 10년은 더 지속될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랬던 이창호였건만 새천년을 맞자마자 그 위상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정확히 진단하면 그 조짐은 2000년 벽두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눈에 띄게 스타트가 부진했던 것이다. 그해 2월 말까지 보인 전적이 3승3패. 99년 같은 기간 기록한 전적이 9승1패였음을 감안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성적이었다. 물론 이창호는 여름에 접어들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힘을 내 여전히 부동의 1위 자리를 고수하긴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심상치 않은 현상은 올해 들어 또 나타났다. 2월 말까지 8승7패. 뭔가 이상징후가 감지된다.

그동안 이창호 9단은 세계대회 결승에서 단판승부가 아닌, 3번기든 5번기든 번기(番棋)로 우승을 가리는 대결에서 딱 한 번만 졌을 정도로 ‘번기 불패 신화’를 갖고 있다. 그 한 번이 99년 12월 말 중국에서 열린 제1회 춘란배 결승3번기. 스승 조훈현 9단에게 먼저 1승을 거둔 뒤 2패를 당해 ‘결승 불패행진’이 마감되었는데, 그때의 3국 패배가 석연치 않아 현지 중국기사들로부터 ‘쌀 떨어진(?) 스승을 봐준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번기 결승에서 이번처럼 1, 2국을 내리 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세돌 3단이 그만큼 급성장한 때문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최근의 이창호 9단의 바둑내용이 도무지 이전 그의 바둑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은 언제나 그렇듯 실력이 모자라 질 뿐이라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세돌 3단과의 바둑뿐만 아니라 앞서 열린 창하오(常昊) 9단과의 응씨배 두 판도 우승은 했지만 실은 그 내용면에서 제 색깔을 전혀 발휘하지 못한 고전이었다. 갑작스런 슬럼프의 원인은 무엇일까.

▲1 목표상실에서 오는 권태감

최근 이창호 9단은 한 선배기사에게 “바둑이 싫어졌다”고 마음의 한자락을 토로한 적이 있다. 물론 정색을 하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예전의 이창호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백이었기에 적이 놀랐다고 한다. 동생 이영호씨의 말에서도 그런 감을 잡게 된다. 예전의 형은 그 어떤 대국이라도 목숨을 건 듯 심각하고 진지하게 전력투구하는 모습이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공부도 예전만 못하다. 마치 바둑 외에는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사람이 어느날 다른 많은 존재를 알아버린 것처럼….

일찍이 14세 때부터 타이틀을 따기 시작하여 20대에 이미 세계를 정복해버린 천재. 그동안 미답지로 남았던 응씨배를 올해 마저 석권함으로써 더 이상의 목표가 없어진 정복자. 어떤 이는 이를 헝그리 정신의 실종이라고 말한다. 승부세계에서 투지는 헝그리 정신과 맞물려 있다.

이제 20대 중반에 들어선 이창호 9단이 바둑이 싫어졌다고 함은 무슨 뜻인가. 권태기를 맞았다는 것이 아닌가. 이번 이세돌 3단과의 대국에서도 이창호 9단은 결정적인 승부처에서 전혀 쪼지 못했다. 예전같이 화두(話頭)를 붙들 듯했으면 결코 실족할 만한 대목이 아니었다는 게 대다수 기사들의 진단이다. 국후검토 때 이창호 9단은 놀랍게도 “귀찮아서… 어려워서…”란 말로 끝을 흐렸는데, 이에 대해 서봉수 9단은 “귀찮고 어려워서 그렇게 두었다는 얘기는, 곧 대충 수가 보이니까 더 이상 열심히 수읽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이 말 속에는 바둑에 대한 이창호의 권태감이 그대로 녹아 있다”고 풀이한다.

20대의 나이도 나이거니와 하루 3시간씩 치는 테니스에 기수련까지 병행하고 있는 이창호 9단이고 보면 이 이상 체력적으로 충실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체력적으로 문제가 없는데도 컨디션 난조를 보이고 있다면 필시 그 어떤 정신적인 공황이 집중력 저하를 초래하고 있다고 할 수밖에.

▲2 쫓기는 자의 심적 부담

지금까지 이창호 9단은 세계바둑계를 점령해오면서 그 정복 대상이 대부분 나이 많은 선배였다. 아니면 기껏해야 비슷한 연배의 상대였지만 어느새 성큼 자란 후배들의 도전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 돼버렸다. 여섯 살 어린 이세돌 3단의 경우 지금까지 싸워온 상대 중 가장 나이 어린 기사다. “이젠 창호도 후배들의 도전을 맞아 싸워야 하는, 쫓기는 입장이잖아. 이겨봐야 본전이고 지면 망신이고….” 이창호 9단의 2연패를 지켜보며 조훈현 9단은, 마치 이전 제자의 도전을 받았던 자신의 심정이 그랬다는 듯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3 기풍변화에 따른 일시적 현상

프랑스식 개구리요리법은 개구리를 산 채로 물에 집어넣고 서서히 온도를 높인다고 한다. 그러면 변온동물인 개구리는 물의 온도에 맞춰 자신의 체온를 끌어올리다가 죽는다. 이창호 9단의 바둑이 그렇다. 쾌도난마(快刀亂麻) 식이 아니라 특유의 계산력을 앞세워 슬로 템포로, 가랑비에 옷 적시듯 운행하다 종반에서 승부를 보는 기풍이다. 이러한 수비바둑으로 그는 세계 바둑계를 평정했다.

그러나 근래 이창호 9단의 기풍이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이젠 고정된 틀을 벗어나 다양한 바둑을 두어보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지난해나 올 벽두의 눈에 띄는 패점은 그런 변화의 후폭풍에 해당하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말하는 평론가가 적지 않다.

이세돌 3단에게 당한 두 판도 장기인 ‘수비의 방패’를 버리고 익숙지 않은 ‘공격의 창검’을 휘두르다가 거꾸로 대마가 잡히는 불상사를 당한 것이다. 연패보다 더 큰 문제는 운영과정이나 공격과정이 전혀 이창호답지 않고 섣부르기 그지없어 1국 패배를 지켜본 최명훈 7단 같은 경우는 아예 2국 패배까지 예언했을 정도였다.

▲4 후배기사들의 수준 향상

앞서 개척하는 자의 외로움이자 고충이다. 선두에 서서 길을 닦는 속도보다 닦아놓은 길을 달려오는 후학들의 속도는 당연히 빠를 수밖에 없다. 불과 1∼2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포스트 이창호군으로 꼽히는 신예기사들은 이창호 9단에 대해 “언젠가는(몇 년이 걸릴 지는 모르지만)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며 의욕을 앞세웠지만, 지금은 “언제라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만큼 이창호 바둑에 대한 연구가 굉장했고 그 격차가 줄어들었다는 얘기다. 이창호 9단이 뭔가 기풍변화를 꾀하는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 아닐까.

<정용진/ '월간 바둑' 편집장>

(주간동아 제2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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