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 돈 명단유출… 검사들 "또 정치검찰" 술렁

  • 입력 2001년 1월 10일 18시 28분


《분노와 격앙. 안기부 자금을 지원받은 정치인들의 명단이 유출된 이후의 검찰 분위기다. 검찰 내부에서는 “검찰과 정권의 ‘내통’사실이 드러나 명분 있는 수사의 정당성이 훼손됐다”는 안타까움과 “내통의 고리를 끊지 못하면 검찰권 독립은 요원하다”는 한탄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검사들의 분노〓서울지검의 한 중견검사는 “수사는 전쟁과 같아서 힘과 법 못지않게 명분이 필요하다. 명단 유출로 국기를 문란시킨 이 사건에 대한 수사의 정당성이 훼손돼 ‘다 된 밥에 코 빠뜨린’ 격이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검사들은 “검찰과 정권의 내통에 대해 반신반의했는데 사실로 드러나고 보니 보통 문제가 아니다. 관행이라면 반드시 개선돼야 할 악폐다”(수도권의 한 검사) “정치검찰의 ‘알몸’을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다”(지방의 한 간부검사)는 등의 자성론을 제기했다.

더 나아가 한 부장검사는 “‘정권의 하수인’이라는 욕을 먹을 바에는 차라리 대검을 청와대 직속으로 만들어 국정원처럼 대통령이 직접 통제하도록 하라”며 울분을 터뜨렸다.

검사들은 그 대응책을 서슴없이 쏟아내기도 했다. 서울지검의 한 중견검사는 “명단유출은 지난해 옷로비 의혹사건 당시 사직동팀 보고서를 유출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기밀 누설에 해당한다”며 “관련자를 반드시 찾아내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서울지검 형사부의 한 검사는 “청와대 파견검사가 연결고리가 되는 만큼 법원처럼 검사는 청와대에서 일할 수 없게 하거나 다시 검찰로 돌아올 수 없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통의 원인과 구조〓 검찰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의 일원이면서 동시에 독립적으로 국가형벌권을 수행하는 ‘준사법기관’이다. 또 정권 쪽에서 보면 통치에 이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국가 공권력’이기도 하다.

따라서 역대 정권은 두 가지 이유로 검찰권을 통제해 왔다. 우선 검찰이 자유롭게 권한을 행사하면 그 칼날이 정권의 비리로 향할 위험이 있다. 또 검찰을 통해 국가형벌권 발동이라는 명분으로 정적(政敵)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도 있다.

통제는 구체적으로 인사권을 통해 자기 사람을 핵심요직에 심은 후 중요 수사에 대해 보고를 받고 지시를 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그 내용은 비리혐의의 단서포착, 수사시기, 수사내용 및 범위 등 광범위하다.

이 과정에는 검찰에 형식상으로만 사표를 내고 청와대에 파견된 검사출신 민정수석비서관(차관급)과 사정비서관 민정비서관(1급)이 핵심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은 재임용 형식으로 검찰로 돌아올 수 있다.

이번 사건에서도 검찰은 안기부 돈을 받은 정치인 180명의 이름과 액수가 담긴 보고서 1부를 청와대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통의 역사〓 검찰 고위직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이런 관행은 검찰이 생긴 이래 지속돼 왔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97년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 비리사건 수사당시 심재륜(沈在淪)대검 중수부장은 청와대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일절 보고를 하지 않았다. 그의 완강한 태도에 청와대는 당황해 했고 급기야 중수부장 휘하의 수사기획관을 통해 보고를 받거나 지시를 했다.

지난해 8월의 총선문건 유출사건도 검찰과 청와대의 내통 과정과 관계가 있다는 의혹이 있었다.

<신석호·이명건기자>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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